Franklin Pierce 프랭클린 피어스 |
출생: 1804년 11월 23일 |
사망: 1869년 10월 8일 | |
정당: 민주당(Democrat) | |
Presidency: 1853년부터 1857년 | |
부통령: 윌리엄 R. 킹(William R. King) | |
별명: Handsome Frank, 잘생긴 프랭크 |
●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과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지하철도, Underground Railroad)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지하철도? 어떻게 번역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The Underground Railroad)는 탈출한 노예들이 미국 남부에서 북부로 도주할 수 있도록 협력자들이 만들어낸 단체이자 일종의 탈출경로와 같은 네트워크였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따라 협력자들의 거주지에 거취를 옮겨 다니며 도주하는 노예들은 북극성을 따라 미국 북부로 향하게 된다. (북극성은 일종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상징이 되었다.)
양심적인 백인들은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일원으로서 도주하는 노예들을 위해 거취를 마련해주었다. 많은 이들이 퀘이커교도(Quaker, 퀘이커 오트밀 할 때의 그 퀘이커)들이었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따라서 미국 남부와 북부를 위험을 무릅쓰고 오가며 도망자 노예 행렬들을 이끄는 기관사들(컨덕터, conductor라고 지하철도를 이끄는 기관사로 표현하였다.)도 존재하였는데, 해리엇 터브먼은 이 위험천만한 일을 수십번이나 성공적으로 이끈 대표적인 기관사 중 한 명이었다. )
해리엇 터브먼 자신도 남부로부터 도망을 친 노예였다. 그녀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따라서 자신의 가족을 포함하여 약 300명의 노예들을 성공적으로 해방시켰다.
해리엇 터브먼의 행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를 ‘그녀의 민족의 모세’(Moses of Her People)로 칭송하게 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 할 당시, 해리엇 터브먼은 그녀의 경험을 살려 지리적인 정보를 북군에 제공을 하였고, 정찰꾼으로서 직접적인 활약 또한 하였다.
해리엇 터브먼은 정찰 활동을 하면서 북군들이 익숙하지 않은 중요한 지리 정보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남부군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등 맹 활약을 하였다.
해리엇 터브먼은 미국계 아프리카인 여성으로서 무장투쟁까지도 벌였기에 이 당시 시점에서 매우 혁신적인 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 개즈던 매입(The Gadsden Purchase) 과 오스텐드 성명(Ostend Manifesto)
프랭클린 피어스의 행정부는 멕시코 공화국과 뉴 멕시코와 애리조나의 남부 지역에 대한 구매에 대해 1853년부터 협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정부는 현재 애리조나의 투손(Tucson)지방을 포함한 뉴 멕시코와 애리조나 남부의 지역을 1,000만 미국 달러로 구입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협상은 개즈던 매입(Gadsden Purchase)라고 불렸으며, 비록 규모적인 면에서는 멕시코 할양지나 루이지애나 구입과 같은 협상들에 비해 매우 작았지만, 현재 미합중국의 남부 국경을 형성하는 구입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협상이었다.
더불어 프랭클린 피어스와 그의 내각진은 은밀하게 스페인령 쿠바 섬에 대한 구입 협상을 시도를 하고자 하였다. 국무부 장관 윌리엄 말시(William Marcy)과 미국의 스페인 외교관 피에르 줄레(Pierre Soule)는 은밀하게 대영제국과 프랑스 정부에게 쿠바 구입에 대한 전략을 자문 받고 있었다.
프랭클린의 행정부는 이를 토대로 1854년 오스텐드 성명(Ostend Manifesto)라는 문서를 생성하는데, 이 문서에는 윌리엄 말시와 피에르 줄레가 스페인이 1억 2천만 달러로 스페인령 쿠바 섬 판매를 거부할 시 전쟁선포를 불사할 각오가 되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오스텐드 성명은 유출이 되었고, 미국의 급작스러운 팽창주의적 대외정책 변화와 쿠바 섬에도 노예가 중요하였기에 남부 주들의 노예제 확대에만 이득을 줄 것이라는 대중들과 정치권의 반박으로 인하여 쿠바 섬에 대한 프랭클린 피어스의 계획들은 모두 무산되었다.
● 미국의 철도 건설
1850년대에 들어서서 미국의 철도망은 매우 빠르게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1850년대에만 무려 21,000 마일(약 34,000km)의 철로가 건설되었다.
미국이 대서양과 태평양까지 모두 잇게 되면서, 미국의 교통망 정비는 매우 시급하였고, 이 중에서도 철도망의 확보는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 캔자스-네브라스카 법 (The Kansas-Nebraska Act)
철도망의 건설은 어느 지역에든 교통의 편리성, 무역의 증가와 인구 유입 등 지역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미국은 철도망의 연장에 심열을 기울였는데, 이중 상원 의원 스티븐 더글라스(Stephen Douglas)는 미국 전역에서 철도 건설을 독려한 정치인들 중 명이었다.
스티븐 더글라스는 시카고에서의 철도망을 미국 서부 전역으로 연장을 하고 싶었지만, 미국 의회에서의 발언권이 약하였던 남부 노예 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를 역이용하기로 결심하였다.
남부주의 상원의원들은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주에 한정하여 철도 건설을 승인하고 지지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는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는 발언이었지만 스티븐 더글라스는 아직 중립지대로서 영역의 구분이 되지 않은 네브라스카 영역(네브라스카 주가 아닌 그 이전에 아직 행정적으로 편입 되지 않은 영토를 의미한다.)에 대한 구분안을 제시한다.
스티븐 더글라스는 일명 캔자스-네브라스카 법(Kansas-Nebraska Act)를 제안하는데, 이 법안은 아직 행정적으로 편입 되지 않은 네브라스카 영역을 두 곳으로 구분하여 북부의 캔자스와 남부의 네브라스카로 나누는 법안이었다.
스티븐 더글라스는 이 각 두 지역의 노예 주 또는 자유 주 여부는 각 지역 투표에 맡길 것을 제안하였다.
대체적으로 네브라스카 영역의 남부에 해당하는 캔자스 지역은 노예 제도를 지지할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남부 주들이 철도 연장안에 동의를 하도록 스티븐 더글라스가 제시한 타협안이었다.
하지만 스티븐 더글라스가 제시한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은 1820년 체결된 미주리 타협안을 직접적으로 어기는 법안이었다.
캔자스와 네브라스카 모두 미주리 타협안에 의해 제시된36°30’ 경계의 이북에 있었고, 미주리 타협안에 따라서 네브라스카와 캔자스 영역 모두 36°30’ 북쪽에 위치하였기에 자유주가 되었어야 했다.
이로 인해 네브라스카-캔자스 법안은 큰 모순이 되었으며, 캔자스에서도 큰 논란을 일으켜 피의 캔자스(Bleeding Kansas)라고 불리는 일련의 유혈사태들로 이어진다.
● 피의 캔자스 (Bleeding Kansas) – 캔자스에서 벌여지는 일련의 유혈 사태들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안은 1820년의 미주리 타협안을 직접적으로 어기는 법안이었지만, 상원의회에서 결국 통과가 되고 만다.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안이 미국 남북전쟁의 전조가 될 것이라는 점은 아무도 예상치 못하였을 것이다.
캔자스 지역에서 노예제도에 대한 찬반투표가 진행이 될 시기 즈음에, 노예제도 지지자와 노예제도 철폐 지지자들 모두 불법적으로 캔자스 주민임을 가장하여 몰려들기 시작한다.
자유 토지 운동가(Free-Soiler)들은 노예제도 반대를 위해서 캔자스로 몰렸고, 노예제도 지지를 하는 미주리의 보더 루피안(Border Ruffian)과 같은 노예 지지 집단들도 캔자스에 몰려 들었다.
이들은 모두 극단적인 집단들로 이들의 유입으로 하여금 캔자스는 이미 ‘내전’과 비슷한 유혈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캔자스의 주지사는 이런 불법 주(State, 주정부 할 때 주)민들의 유입을 방지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존 브라운(John Brown)과 같은 과격 노예제 철폐 지지자들은 ‘피의 캔자스’(Bleeding Kansas)라고 불리는 유혈 사태를 일으켰고(오히려 노예제 철폐 지지자들이 일으킨 사건이다.) 이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200명이 사망하였다.
캔자스에 피바람이 부는 동안 상원 의회에서도 폭력사태가 발생하였다.
매사추세츠 의원 찰스 섬너(Charles Sumner)(은 의회에서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 연설을 하였고, 이에 화가 난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노예제도 지지 정치인 프레스턴 브룩스(Preston Brooks)는 찰스 섬너를 그 자리에서 폭행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 리바이스(Levi’s)과 청바지
리바이 슈트라우스(Levi Strauss)는 골드 러시(Gold Rush)를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이주를 해온 독일 출신의 이민자였다.
리바이 슈트라우스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를 하면서 데님이라고 불리는 청색 목화 재질의 옷감을 다량으로 확보한 상태였는데, 리바이 슈트라우스는 곧 바로 금을 캐는 미국 서부의 광부들이 질긴 작업복에 대한 수요가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리바이는 곧바로 자신이 가진 데님 소재로부터 ‘청바지’(블루진, blue jean)를 처음으로 만들었고, 이는 광부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리바이 슈트라우스의 데님 청바지는 곧바로 유명 브랜드 리바이스(Levi’s)의 설립으로 이어지고, 현재 까지도 리바이 슈트라우스가 세운 리바이스(Levi’s)는 의류업계의 거대 기업으로서 의류를 유통하고 있다.
● 포경 산업과 모비 딕(Moby Dick)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은 1851년 자신의 유명한 소설 모비 딕(Moby Dick)를 출판한다. 모비 딕에서 묘사된 포경산업은 이 당시 산업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이 고래 기름 또는 경유(鯨油, 블러버, Blubber) (석유에서 생산하는 경유와 다르다)는 직물 산업, 공장의 장비 가동, 향초(향이 아닌 실질적으로 불빛을 비추는 용도의) 과 전기의 발명 이전에 길거리를 밝히는 역할을 하던 기름 램프의 이용 등 산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고래는 포유류로서 바에서 부유를 하거나 에너지 저장 용도로 기름(경유)를 저장 해 두는데, 이 기름 자체가 매우 긴 탄소고리를 가지고, 연료로서 사용 가능한 탄소 화합 조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산업적인 기능을 수행 할 수 있었다.
포경산업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모비 딕에서는 이러한 포경 산업의 위험성과 시대상을 담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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