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A] - 미국 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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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 History

[USA] - 미국 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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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Buchanan 제임스 뷰캐넌

출생: 179142391
사망: 186861
정당: 민주당(Democrat)
재임기간: 1857년부터 1861
부통령: C. 브래킨리즈(John C. Breckinridge)
별명: Ten-cent Jimmy 10센트 지미

 

드레드-스콧 재판 (Dred Scott Case)

 

드레드 스콧은 미주리에 살던 노예로 그의 주인이 미주리에서 일리노이로 이사를 가면서 문제가 붉어졌다.

미주리는 노예주였지만 일리노이 주는 자유주이었기 때문에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드레드 스콧이 해방 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였다. 드레드-스콧의 해방 여부는 대법원 판결까지 이어지게 된다.

185736, 대법원은 아주 놀라운 판결을 하게 된다.

 

 

미국 대법원은 드레드 스콧의 주인이 미주리주에서 일리노이 주로 이사를 갔다는 이유로 해방이 될 수 없다고 판결을 하였다. 대법원에서는1820년의 미주리 타협안은 엄격하게 해석하면 헌법에 위배되는 타협안이라고도 판결을 하였다.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법리적인 근거는 연방 의회가 각 주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미국 설립 이전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노예제도를 금지하는 행위는 헌법에 위배 되며, 연방의회는 주 정부만이 노예제도를 자신의 영역에서 제외’(여기서 사용 된 문맥은 금지가 아닌 제외) 권고를 할 수 있는 것이 상한선이라고 규정하였다.

 

 

미국 대법원은 드레드 스콧의 판결에 대해 7-2로 판결을 하였으며, 노예는 시민이 아닌 재산이라고 규정을 하였다. 대법원장 로저 B. 테이니(Roger B. Taney)는 드레드 스콧 재판결과에 대해서 드레드 스콧은 어떤 백인이든 존중해야 마땅한 권리가 없다고 판결문에 기재하였다.

( “no rights which any white man was bound to respect”) 노예제도 지지자은 드레드 스콧 재판 결과를 환영 하였던 것과 달리 노예제 철폐 주의자들은 극심하게 분노 하였다.

 

 

제임스 뷰캐넌의 취임식 미국 연방을 지키기 위한 노력

 

제임스 뷰캐넌은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매우 유능한 변호사로 정평이 나서 많은 이들이 제임스 뷰캐넌에게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뷰캐넌 그 자신은 노예제도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지만, 변호사로서의 법리적 관점 상 그는 연방정부가 주 정부들의 노예제도 유지 여부에 대해서 강제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제임스 뷰캐넌은 노예제도의 찬반 여부와 관계없이 미국 연방이 노예 주들을 받아들이고 미국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을 둘러싼 피의 캔자스 사태와 같이 미국 남부와 미국 북부간의 갈등은 이미 물리적인 충돌로도 이어진 상태라서 제임스 뷰캐넌에게는 미국 연방 정부 유지라는 큰 숙제가 있었기에 제임스 뷰캐넌의 취임식 연설에 많은 이목이 집중 되고 있던 상태였다.

 

 

제임스 뷰캐넌은 취임식 연설에서 남부 주들은 노예제 유지 또는 폐지에 대한 선택권이 있었던 만큼 미주리 타협안과 같은 협의안들과 관계 없이 새롭게 미국에 편입된 지역들 또한 똑 같은 권리를 가질 필요성이 있다고 연설 하였다.

그의 취임 연설 이후 대법원에서 드레드 스콧 사건에 대한 재판결과 또한 제임스 뷰캐넌의 법리적 해석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제임스 뷰캐넌의 법리적인 이해는 옳았더라도(당시 기준으로 현재 기준에서는 당연히 아니다.0 미국 북부 주들이 요구하는 범 도덕적인 관점을 수용하지는 못하였기에, 제임스 뷰캐넌의 노예제도에 대한 신중한 대처는 북부로부터 큰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캔자스 의회(The Kansas Constitution)

제임스 뷰캐넌은 미주리 출신의 로버트 워커(Robert Walker)을 캔자스의 새 주지사로 임명을 한다. 로버트 워커는 주 의회 설립 개최를 위해 르캄프턴(Lecompton)에서 대표회의를 개최한다. 르캄프턴회에서 캔자스 대표자들은 모여서 캔자스주 의회의 설립을 선포하는데, 캔자스 주 의회 설립안에 노예제 찬성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캔자스 주 의회 설립 선포안에 대하여 노예제가 찬성안이 포함 되었다는 사실에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투표가 대표들에게 조작이 되었다며, 캔자스 주 의회 성립에 훼방을 놓기 시작하였다.

 

 

제임스 뷰캐넌은 르캄프턴회에서 논의된 캔자스 의회 설립안과 로버트 워커를 지지 하였지만 상원 의회에서는 제임스 뷰캐넌에 반대하여 캔자스 주 국민 투표에 이 의제를 붙일 것을 제안하였다.

스티븐 더글라스(캔자스-네브라스카 법안을 발의하였던 의원)의 주도하에 캔자스 주 시민들 투표가 제안되어 캔자스 대표단이 아닌 캔자스 시민들의 진정한 의중을 반영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캔자스에서 두 번의 범 캔자스 주 시민 투표가 열렸고, 제법 큰 표 차이로 노예제 폐지에 대해서 캔자스 시민들이 찬성하여 결국 캔자스 주의회는 노예제 폐지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첫 번째 시민 투표에 대해서 제임스 뷰캐넌이 받아 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여 두 번에 걸친 시민 투표 끝에 두 번 모두 큰 표차이로 노예제 폐지가 확정 되었다.

결과적으로 남부의 노예주들이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안을 통해 얻은 수확이 하나도 없게 된 셈이 되었다. 제임스 뷰캐넌은 이 결과가 남부 주들을 크게 자극 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투표 결과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소저너 트루스 (Sojourner Truth)  

 

 이사벨 반 바그너(Isabell Van Wagener)라는 해방된 노예 출신의 여성은 1843년 자신의 이름을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신실한 성인으로 의역)으로 개명하였다.

소저너 트루스는 여성 인권 신장과 노예제 해방의 의의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운동가가 되었다. 그녀는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교회와 마을의 저잣거리에서 여성 인권과 노예제 해방에 대한 연설을 하였고, 그녀의 연설은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이 되었다.

 

 

포니 익스프레스(The Pony Express, 조랑말 급행 우편배달)

 

윌리엄 H 러셀 (William H. Russell)은 미국의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범 대륙적인 우편전달 수단이 필요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캘리포니아는 미국의 멕시코 할양지 이양 이후 금맥이 발견 되면서 미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주로 급부상을 한 지역이었지만 미국의 정치적 상업적 핵심 인물들과 시설이 모인 미국 동부와 거리가 너무 멀었다.

윌리엄 러셀은 포니 익스프레스(Pony Express)라는 급행 우편물 배달 사업을 고안했다.

 

 

포니 익스프레스는 10마일(16km)간격으로 말이나 인부들이 쉴 수 있는 역참을 배치하여 우편물 배달부들이 주기적으로 말을 교환하여 빠르게 우편물을 배달할 수 있는 체계였다. 윌리엄 러셀은 미주리의 세인트 조셉(St. Joseph)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10일만에 우편을 배달하는 성과를 대중들에게 시연하였다.

 

 

하지만 그 드넓은 미국 대륙에서 엄청난 수의 역참 시설(말 사료, 부동산 비 등)들을 유지하는 고정 비용을 감당하기에는 포니 익스프레스의 수익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이미 모스의 전신기의 효율성을 경험한 미국 정부는 196110월부터 범 대륙적인 전신기 운영을 실시할 정도로 전신기에 대한 기반 시설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결국 포니 익스프레스는 대차게 망하고 말았다.

 

링컨-더글라스 토론 (Lincoln-Douglass Debates)

 

에이브러햄 링컨은 공화당(Republican)의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주자로서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을 제시했던 민주당(Democrat) 중진 의원 스티븐 더글라스에 맞서게 된다.

스티븐 더글라스의 별명은 작은 거인(Little Giant)으로 그는 상원 의회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중진 의원이었다.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 과정은 링컨-더글라스 토론(Lincoln-Douglass Debates)로 불리는 7번의 토론회를 통해 진행이 되었다.

일련의 토론 과정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은 자유의 가치노예제 폐지의 도덕적 정당성을 내세운 반면 스티븐 더글라스는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연방을 분열 시키고자 한다는 비판을 강하게 내세웠다.

 

링컨-더글라스 토론 (Lincoln-Douglass Debates)

 

이 일련의 토론 과정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은 내부에서 분열된 집안은 일어설 수 없다. 절반은 노예제를 유지하고 절반은 노예제를 반대하는 상태에서는 이 정부는 영원히 유지될 수 없다는 인상적인 연설을 남겼다.  

“ 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 “This government cannot endure permanently half slave and half free.”

 

 

에이브러햄 링컨은 결국 스티븐 더글라스에게 일리노의 상원 의원 선거에서 패배하지만, 스티븐 더글라스의 정치적 입지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스티븐 더글라스는 프리포트 교리(직역하면 자유항 교리, Freeport Doctrine)을 주장하는데, 이는 법적으로 노예제도를 금지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현 시점에서 보면 의아 할 수 있지만 이미 당시 대법원의 드레드 스콧 재판의 판결을 통해 정부가 노예제 억제에 대해 최대한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법에서 제외하는 것이라고 명시하였기에 스티븐 더글라스의 프리포트 교리는 당시 대법원 판결에 위배되었다.

또한, 많은 민주당원(Democrats)들은 노예제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스티븐 더글라스는 민주당 내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결국 민주당의 대선 주자로 나서지 못하게 된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와 반대로 일리노이 상원의원직은 잃었지만 그의 연설들은 그로 하여금 단번에 공화당(Republican)의 대통령 선거주자로 발돋움하는 기회가 되었다.

 

 

 

존 브라운 (John Brown)

 

존 브라운은 당시 가장 극렬한 백인 남성 노예제 폐지론자이었다.

존 브라운은 피의 캔자스 사태와 같은 유혈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들 중 한 명이었으며, 그는 이후 한 단계 더 나서서 버지니아주의 하퍼스 패리(Harpers Ferry)지역을 습격하고, 하퍼스 패리의 무기고를 탈취하는 대담한 행동을 하기에 이른다.

 

 

추후 남부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는 로버트 리(Robert E. Lee)의 지휘 아래에 존 브라운의 하퍼스 패리 무기고 점령 사태는 진압이 된다.

존 브라운은 반역죄로 재판에 세워졌으며 유죄 판결을 받아 추후에 사형된다.

 

 

미국 연방으로부터의 분리: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과 제퍼슨 데이비스 (Jefferson Davis)

 

노예제 폐지에 적극적이었던 공화당원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고, 제임스 뷰캐넌의 임기가 끝나가는 시점 즈음 남부 주들은 연방정부가 노예제 폐지를 강제하지 않을 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2/3의 선거인단 투표(Electoral Vote)를 얻는 승리를 얻었지만, 유권자 투표(Popular Vote)에서는 40%의 득표율을 얻었다.

우려와는 달리 에이브러햄 링컨과 공화당은 노예제 폐지보다는 미국 연방의 유지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미국의 남부 주들은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연방으로부터 탈퇴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아메리카 연합국의 분리 시기를 표시한 지도 / 노스 캐롤라이나 아칸소 테네시와 버지니아는 포트 섬터의 포격 이후 아메리카 연합국에 가입한다.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사우스 캐롤라이나, 플로리다와 텍사스 7개의 주가 최초로 미국 연방으로부터의 탈퇴를 선언하였다.

7개의 주들이 모여서 18612, 초기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정부를 형성하였고,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를 최초의 아메리카 연합국의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가장 먼저 분리한 7개 주

 

제퍼슨 데이비스는 웨스트 포인트(미국 육군 사관학교) 졸업 생이었으며, 블랙 호크 추장을 압송한 경험, 미국-멕시코 전쟁에도 참전 경험 등 군사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미시시피 주 대표로 하원과 상원에서 모두 의원으로서 활약을 하였고, 프랭클린 피어스 14대 대통령 아래에서 전쟁성 장관직을 역임하여 정치적인 감각 또한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제퍼슨 데이비스 Jefferson Davis

 

신생 아메리카 연합국은 사전 예고없이 제퍼슨 데이비스의 군사적, 정치적 경험과 결정적으로 미국 연방정부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하였기에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아메리카 연합국은 미국 연방정부를 군사적을 굴복 시킬 목적보다는 미국 연방정부가 아메리카 연합국의 독립을 승인 하기를 바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제퍼슨 데이비스에게 큰 기대를 걸고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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