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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 History

[USA] -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과 미국 남북전쟁과 노예제도 -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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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raham Lincoln 에이브러햄 링컨

출생: 1809212
사망: 1865415
정당: 공화당(Republican)
재임기간: 1861년부터 1865
부통령: 한니발 햄린(Hannibal Hamlin) >> 남부 연합에 가입해버림, 앤드류 존슨(Andrew Johnson)
별명: Honest Abe 정직한 에이브

 

프레드릭스버그 전투(The Battle of Fredericksburg)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2년 말 미국 서부에 위치한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 Grant)와 테네시 군(Army of the Tennessee)에게 미시시피 강 유역의 공격을 지시하였고, 미국 동부에 위치한 앰브로스 E. 번사이드(Ambrose E. Burnside)와 포토맥군(Army of the Potomac)에게는 다시 한번 아메리카 연합국의 수도 리치몬드의 공격을 명령한다.

링컨은 장기전을 고려하여 서부전선에서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아나콘다 계획의 실현의 일환인 미시시피강 일대 점령을 명령한 한편 동부전선에서 빠르게 전쟁이 끝나기를 고대하는 정치적 여론에 따라 앰브로스 E 번사이드에게 리치몬드의 직접 점령을 명령한다.

 

앰브로스  E  번사이드과 프레드릭스버그 전투의 전개 지도

 

앰브로스 E 번사이드는 라파해노크 강의 남쪽(Rappahannock River)에 위치한 프레드릭스버그 (Fredericksburg) 하여 하여 RF&P 라고 드-버그& 도(Richmond Fredericksburg and Potomac Railroad (RF&P 철도))철도를 점령하여 리치몬드로 수송되는 물자를 차단하고 리치몬드에 진격하는 전략을 수립한다.

앰브로스 E 번사이드는 남부의 북버지니아군이 자신들을 따라오기 전에 프레드릭스버그를 차지하면 RF&P 철도를 따라 리치몬드를 빠르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186212월 앰브로스 E. 번사이드의 포토맥군 120,000의 병력이 라파해노크 강에 도달한다. 북군의 포토맥군은 라파해노크 강을 도하하고, 프레드릭스버그에서 격한 도심지 점령 작전 끝에 프레드릭스버그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로버트 E.리의 북버지니아군은 이미 프레드릭스 버그 주변에 진을 쳤고, 앰브로스 E 번사이드는 하는 수 없이 참호를 파고 들어간 남부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게 된다.

일련의 전투중에서도 북 버지니아군의 남군 장군 제임스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의 병력은 북군에 특히나 많은 사상자를 안겨주었다.

북군의 포토맥군은 12,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반면 남군의 북 버지니아군은 6,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이미 앰브로스 E. 번사이드가 추구했던 속도전은 실패하였고, 전선이 고착화되었기에 결국 포토맥군은 리치몬드로 향한 진격을 포기하고 후퇴를 결심한다.

 

프레드릭스버그 전역

 

포토맥군은 병력 수나 보급 등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일명 진흙탕 행진(Mud March)라는 굴욕적인 후퇴를 하면서 북부의 여론은 악화되었고, 앰브로스 E. 번사이드 또한 포토맥군 사령관직을 사임한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새롭게 조셉 후커(Joseph Hooker)를 포토맥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이때부터 링컨의 동부전선의 전략적 목표는 리치몬드의 점령보다는 남군의 북버지니아군(Northern Army of Virginia)를 섬멸하는 것으로 수정한다.

 

 

챈슬러스빌 전투(The Battle of Chancellorsville)

조셉 후커(Joseph Hooker)는 일명 완벽한 계획(‘Perfect Plan’)이라고 자부하며 로버트 E.리와 북버지니아군을 포위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조셉 후커는 포토맥군을 라파해노크(Rappahannock River)의 서쪽으로 재배치하여 로버트 E.리와 북버지니아군을 프레드릭스버그에 가둔 이후, 기병대의 기동성을 이용하여 프레드릭스버그와 리치몬드 사이의 경로를 차단하여 포위망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조셉 후커와 그의 챈슬러스빌 전투의 원래 계획도

 

1863427, 북군의 포토맥군 소속의 3개 군단이 라파해노크 강의 남부에서 서쪽으로 기동하여 라파해노크 강과 래피던 강(Rapidan River)을 건너 챈슬러스빌(Chancellorsivlle)에 집결한다.

프레드릭스버그 건너 존 세드윅(John Sedgwick)의 병력 40,000명을 배치 해둔 채, 51일까지 약 70,000명의 포토맥군이 챈슬러스빌에 집결한다.

 

챈슬러스빌 전투의 총 전개

 

포토맥군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로버트 E.리는 다소 군사적으로는 의아하지만 대담한 결정을 내린다.

로버트 E. 리는 186351, 북버지니아군의 병력을 나누어 프레드릭스버그에 북버지니아군 10,000명만 남겨 존 세드윅의 병력 40,000명을 견제하게 하였고, 나머지 북버지니아군 병력을 움직여 챈슬러스빌에 위치한 포토맥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By Map by Hal Jespersen, www.cwmaps.com, CC BY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2164445

 

52, 로버트 E. 리는 토마스 스톤월 잭슨 (Thomas ‘Stonewall’ Jackson) 장군과 다시 북버지니아군의 병력을 나누었고, 스톤월 잭슨 장군에게 챈슬러스빌의 서부 측면 공격을 명령하였다.

스톤월 잭슨의 병력은 전쟁사에 남을 정도의 놀라운 기동전을 펼치며 포토맥군의 서부 측면을 공격하지만,  포토맥군은 이미 방어진을 어느정도 펼쳐 놓은 상태였다.

 

By Map by Hal Jespersen, www.cwmaps.com, CC BY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2164445

 

53, 프레드릭스버그 건너 주둔하던 존 세드윅의 40,000명의 북군 병력은 도하하여 프레드릭스버그의 남군 방어 병력을 몰아내고 챈슬러스빌을 향해 진군하고자 하였다.

이날 2차 프레드릭스버그 전투 (Second Battle of Fredericksburg)와 살렘 교회 전투(Battle of Salem Church)을 포함한 격전으로 인해 20,000명이 전사하여 앤티텀 전투(Battle of Antietam)이후 두번째로 사망자가 많이 속출한 날이 되었다.

결국 두 전선 모두 고착화되었고, 조셉 후커의 프레드릭스버그에 북버지니아군을 가두는 완벽한 작전은 이미 실패로 끝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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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맥군의 장성들은 계속 전선을 유지하고자 하였지만, 조셉 후커는 후퇴를 결정한다.

링컨은 챈스러스빌 전투의 패배 소식을 듣고 신이시여! 신이시여! 국가가 이 패배를 어떻게 생각할까요고 외친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링컨은 이후 개티즈버그 전투가 벌이지기 이전에 조셉 후커를 해임하고 조지 미드(George Meade) 장군을 포토맥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대중들은 또 한번 병력 수나 보급의 우위를 점한 북군의 패배 소식을 접하고 또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아메리카 연합국 또한 많은 일련의 전투들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By Map by Hal Jespersen, www.cwmaps.com, CC BY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2164469

 

이미 북군의 해안 봉쇄나 서부에서 북군의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과 테네시군이 미시시피강의 유역 또한 위협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가뜩이나 공업이나 보급품이 부족하던 남부 연합의 경제상황은 처절하였다.

또한, 로버트 E.리와 궁합이 가장 잘 맞던 토마스 스톤 월 잭슨 장군이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인한 부상에서 회복 못하여 사망하는 등 남부 연합 또한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게티즈버그 전투 (The Battle of Gettysburg)

18636월 로버트 E. (Robert E. Lee)는 게티즈버그 전역(Gettysburg Campaign)이라 불리는 펜실베니아 침공을 이끈다.

제퍼슨 데이비스와 남부연합 정부는 서부의 미시시피 강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인 빅스버그가 포위되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빅스버그에 병력을 지원하고 싶었지만 로버트 E.리는 북버지니아군의 병력을 온전히 동원하여 워싱턴 D.C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여 북부의 전쟁반대 여론을 자극하여 평화 협상에 대한 압박을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반박하였다.

 

Robert E. Lee 로버트 E. 리

 

18635월부터 7월까지 이어진 빅스버그 포위전이 남부군을 이끌던 존 C 팸버튼(John C. Pemberton)이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74일 항복하고, 후술할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버지니아군이 패배하여 74일 후퇴를 하였다는 점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든 남부 아메리카 연합 정부의 상황이 더 낫지 않았을 것이다.

 

좌측 : 게티즈버그 전역에 대한 지도  우측 : 빅스버그 포위전 

 

186363, 로버트 E.리와 75,000명의 북버지니아군 병력이 프레드릭스버그의 서쪽으로 이동하여 웨스트 버지니아(West Virginia, 버지니아 서쪽이 아닌 지명이다.)를 통과하여 펜실베니아를 향해 진격한다.

조셉 후커(아직 조셉 후커가 사령관이었다.)의 포토맥군도 이를 서둘러 추격하기 시작한다. 워낙 다수의 병력들이 기동을 하던 만큼 대열이 길어서 여러 크고 작은 전투들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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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디 스테이션 전투(Brandy Station), 윈체스터 전투(Winchester), 알디 전투(Aldie), 미들버그 전투(Middleburg), 어버필 전투(Upperville), 하노버 전투(Hanover), 칼리슬 전투 (Carlisle)와 헌터스타운 전투(Hunterstown) 등 크고 작은 전투들이 발생하였지만 아직까지 전군 규모의 전투는 벌이지지 않았다.

이 일련의 전투 이후 627일 링컨은 조셉 후커와의 갈등 끝에 그를 해임하고 조지 미드 (George Meade)를 새로운 포토맥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조지 미드 장군

 

이 당시 남군의 북버지니아군은 모든 기병대를 제임스 이월 브라운 통칭 젭(Jeb) 스튜어트(James Ewell Brown "Jeb" Stuart)의 지휘 아래에 통합하여 기병군단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본래 당시 기병대는 도보를 이동하는 병력 대신 앞서서 정찰과 정보를 수집하고, 행군 행렬의 측면을 보호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하지만 젭 스튜어트의 기병대는 여러 북군의 도발에 넘어가 이들을 쫓아 기습전을 무리하게 진행하면서 로버트 E.리와 북버지니아군에 필수적인 군사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629, 로버트 E.리는 제임스 롱 스트리트 장군(James Long Street) 밑에서 임무를 하던 헨리 토마스 해리슨(Henry Thomas Harrison)이라는 스파이가 포토맥 군이 얼마 떨이지지 않은 거리까지 추격 해왔다는 예상치 못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로버트 E.리는 포토맥군이 전력을 추스리는데 시간이 필요하고, 사령관의 성향들이(조지 미드가 사령관이 되었다는 점도 늦게 알았지만 대체적으로 포토맥군 사령관 모두 조심스러운 성향이었다고 한다) 조심스러웠기에 이렇게나 빨리 자신들을 추격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하였다. 더불어 젭 스튜어트의 기병대가 전혀 정보를 최신화 하지 못하고 있었다.

 

좌측 : 제임스 이월 브라운 (젭) 스튜어트   우측 : 헨리 토마스 해리슨

 

로버트 E.리는 흩어진 북 버지니아군의 병력과 사령관들에게 게티즈버그라는 마을 북쪽에 집결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이 때 북군의 존 뷰포드 장군(John Buford)의 기병대가 게티즈버그에 이미 주둔하여 남진하는 북 버지니아군의 병력을 지연시켰고, 잇따라 도착한 북군 포토맥군 소속 존 레놀즈(John F. Reynold)1군단도 도착하여 게티즈버그 방어에 동참하였다.

결국 북군은 집결하기 시작한 북버지니아군에 밀려 후퇴를 하고, 존 레놀즈 장군이 전투 중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좌측 : 존 레놀즈  우측 :존 뷰포드 

 

하지만 이들이 남군을 지연시킨 덕분에 71, 속속이 도착한 포토맥군이 게티즈버그 남부의 무덤능선(세메터리 리즈 / Cemetery Ridge), 리틀 라운드 언덕(Little Round Top)과 악마의 소굴(데빌즈 덴 / Devil’s Den)이라 불리는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점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  

남군은 존 뷰포드와 존 레놀드의 병력을 게티즈버그에서 몰아냈지만, 여러 의사소통의 문제로 인하여 고지대를 놓치고, 포토맥군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장소에서 집결 할 수 있는 시간까지 내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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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로버트 E.리는 양쪽 측면에 공격을 개시한다. 하지만 북군은 방어 태세를 갖춘 상태였고, 남군들은 북군의 주력의 남서부에도 북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라서 이 남서부의 북군을 뒤로 후퇴 시킨 것 이외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젭 스튜어트의 기병대는 이 때쯤 에서야 북군에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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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로버트 E. 리는 이전날의 측면 공격으로 북군이 양 측면으로 병력을 보강하였을 것이라고 믿고, 북군의 중앙으로 기습공격을 계획한다.

안타깝게도 이는 악명 높은 패배인 피켓의 돌격(Pickett’s Charge (Pickett–Pettigrew–Trimble Charge 참전 남군 장군들의 이름 피켓-페티그루-트림블의 돌격으로도 부른다)으로 불리며 남군은 처참하게 패배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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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은 모든 포병 전력을 동원하여 피켓의 돌격을 지원하였지만 역부족이었고, 심지어 남군들은 엄폐물이 없는 평지를 걸어서 돌격 해야 했다.

피켓의 돌격만으로 1,000명이 전사하고, 4,000명이 부상을 당하고, 4,000명의 남군이 포로로 잡혔다. 74, 로버트 E.리는 전날의 치명적인 패배로 인해 버지니아로 후퇴를 하기로 결정한다.

로버트 E.리의 북버지니아군은 27,000명의 사상자를 내게 되는데, 이는 이미 인구적으로도 열세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던 남부 아메리카 연합으로서 매우 치명적이었다.

또한 74일은 서부전선에서 남부 미시시피강의 요충지인 빅스버그의 남부군이 항복을 한 날이기도 하였다. 여러 의미에서 북부군으로서는 기념을 할 독립 기념절이었다.

 

 

게티즈버그 연설 (The Gettysburg Address)

18631119, 에이브러햄 링컨은 게티즈버그에서의 사망자들을 추모하는 연설을 하게 된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연설은 이전의 노예 해방선언과 더불어 미국 남북 전쟁의 의의와 정당성을 확고히 한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단 272개의 단어로 이루어졌지만 노예제나 남북전쟁의 전투와 같은 단어 없이 남북 전쟁이 정의를 위한 성전임을 확고히 한 역사적인 연설이었다. 게티즈버그 연설의 문장 중

국민의, 국민들에 의한, 국민들을 위한 정부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는 인류 역사상으로도 길이 남을 명문이었다.

 

 

게티즈버그 연설 원문 (The Gettysburg Address)

Four score and seven years(one score equals 20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we can not consecrate—we can not hallow—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빅스버그 포위전(Siege of Vicksburg) &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Sherman’s March to the Sea)

 

186212, 링컨은 당시 동부전선의 포토맥군 사령관 앰브로스 번사이드에게 리치몬드 침공을 명령하는 동안 서부전선의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 Grant)과 테니시군 (Army of the Tennessee) 에게 빅스버그의 점령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의 장악을 명령하였다.

 

율리시스  S.  그랜트

 

미시시피강의 중심에 위치한 빅스버그는 여러 면에서 미국 남북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라고 칭해도 될 정도로 중요한 요새였다.

빅스버그는 미시시피 남부 철도(Southern Railroad of Mississippi)와 빅스버그-슈레브포트와 텍사스 철도 (Vicksburg, Shreveport & Texas Railroad)를 연결하는 동시에 남부 연합을 가르는 미시시피강의 수운을 통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지리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보강이 잘 된 천연 요새였다.

북군의 해군들 또한 미국의 해안과 미시시피강의 남부를 장악하고 있었어도 빅스버그 요새로 인하여 미시시피강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으로서는 아나콘다 작전의 일환으로서도 남부 연합을 두 개로 분단시켜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도 빅스버그를 반드시 점령해야 했던 반면 제퍼슨 데이비스는 빅스버그를 반드시 사수해야 남북전쟁에 승리는 못하더라도 시간을 끌어 정식 정부로 승인이라도 받을 수 있는 희망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존 C. 팸버튼(John C. Pemberton)이 이끌던 미시시피군 (Confederate Army of Mississippi)는 율리시스 S.그랜트와 테네시군 (Army of the Tennessee)에게 점점 밀려 18635월 중순 결국 빅스버그에 포위되고 말았다.

 

 

5월에서 7월까지 존 C. 팸버튼은 항전을 하였지만, 미시시피강에서의 북군 해군 포격과 테네시군의 포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74일 항복하고 말았다. 이 시점부터는 서부전선이 남북전쟁의 주 무대가 되었다.

 

 

얼마 후 링컨은 율리시스 S.그랜트를 새롭게 창설된 서부전선의 북군을 모두 통합하여 새롭게 창설된 미시시피 통합군(Military Division of the Mississippi)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추후 다시 율리시스 S.그랜트를 미국의 육군 총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당시에는 4성 장군, 현재의 5성 원수급)

율리시스 S.그랜트를 이어 윌리엄 테쿰셰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이 미시시피 통합군(Military Division of the Mississippi) 사령관이 되었다.

윌리엄 테쿰셰 셔먼은 율리시스 S. 그랜트와 함께 서부전선의 주요 사령관으로 이미 활약을 하였으며, 그는 자신의 보급품들을 보호할 소수의 병력을 남기고, 조지아 주 전역을 초토화 시켜버리는 일명 바다로의 행진을 시작한다.

 

William Tecumseh Sherman

 

윌리엄 테쿰셰 셔먼은 철도, 공장, 농장이나 민간인 재산을 포함한 기반 시설들을 모조리 파괴하여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초토화 작전을 실행하며 조지아주 전역을 돌며 아메리카 연합 깊숙이 침투를 한다. 바다로의 행진의 목표는 조지아 주 전역을 초토화시키면서 대서양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다.

 

 

윌리엄 테쿰셰 셔먼과 미시시피 통합군은 조지아 주를 완전 초토화 시키면서 애틀랜타(Atlanta)를 불태우고, 사바나시(City of Savannah)까지도 초토화 시키며 대서양에 도달을 한다.

윌리엄 테쿰셰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은 현대전의 기본 개념을 적용한 작전으로 평가되었지만 300 마일(480km)의 철로가 파괴되고, 950십만 파운드(4,500)의 옥수수 약탈 그리고 수많은 부동산 재산등을 파괴하여 10년 이상 남부 미국의 경제를 침체 시키는 악영향을 미쳤다.

 

 

남북전쟁의 종료

 

율리시스 S. 그랜트는 미국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이후 오버랜드 전역(Overland Campaign) 또는 윌더니스 전역(Wilderness Campaign)으로 불리는 군사 작전들을 동부전선에서 시행한다.

율리시스 S. 그랜트의 전략적인 목표는 리치몬드와 리치몬드 남부의 주요 도시인 피터스버그(Petersburg)를 포위하고 말려 죽이는 것이었다.

 

By Map by Hal Jespersen, www.posix.com/CW, CC BY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4494069

 

윌리엄 테쿰셰 셔먼의 미시시피 통합군이 대서양의 사바나시에 도달하자 율시시스 S.그랜트는 셔먼의 병력들로 하여금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노스 캐롤라이나를 돌파할 것을 명령한다.

\196543, 리치몬드는 함락이 되어버렸고, 196549, 아메리카 연합국의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이 되었던 로버트 E.리 또한 남북 전쟁 최후의 전투인 어포매틱스 코트 하우스 전투를 치른 이후 (어포매틱스 법원 전투, the Battle of Appomattox Court House)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항복서명을 하였다.

 

 

제퍼슨 디이브스는 1865522일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1867513일이 되어서야 보석금을 내고 석방된다. 제퍼슨 데이비스는 석방된 이후에도 연방정부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된 상태였으며, 앤드류 존슨 정부 당시 제기된 1868년 반란 참가자에 대한 면책과 특사((amnesty and pardon to all participants in the rebellion)법이 율리시스 S.그랜트 대통령 시기인 1872년에 통과되어서야 자신의 시민권을 찾을 수 있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암살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 수습을 시작하기도 전에 1865415,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라는 극렬 남부연합분리주의자에게 암살 당하고 말았다.

1865414, 에이브러햄 링컨은 포드 극장(Ford’s Theater)이라는 극장에서 희극 우리의 미국 조카(Our American Cousin)을 관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데린저 권총을 든 배우 존 윌크스 부스가 링컨의 뒷방향에서 링컨을 쏘아버렸다.

 

 

존 윌크스 부스는 링컨이 암살된 극장인 포드 극장의 주인  T. 포드(John T. Ford)와 친분이 있으며 포드 극자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하였으며, 공연의 구조를 잘 알고 자유롭게 모든 곳에 드나들 수 있는 인물이었다.

 

 

존 윌크스 부스는 링컨 암살 이후 버지니아까지 도주하는 데에도 성공하였으나 프레드릭스버그 근처 가렛의 농장(Garrett’s Farm)에서 연방군에게 포위 되어 저항하다가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토록 비극적인 사고로 사망을 하지만, 남북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미국 연방을 보존한 그의 노력은 현재의 미국을 만들 수 있었다.

 

미국 노예제도의 폐지에 앞선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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