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A] - 미국 11대 대통령 제임스 녹스 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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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 History

[USA] - 미국 11대 대통령 제임스 녹스 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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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Knox Polk 제임스 녹스 폴크

출생: 1795112
사망: 1849615
정당: 민주당 (Democrat)
재임기간: 1845년부터 1849
부통령: 조지 M.달라스 George M. Dallas
별명: Young Hickory, 어린 히코리, 앤드류 잭슨의 늙은 고집불통을 이은 어린 고집불통

 

Manifest Destiney 명백한 운명/미국의 명백한 운명 (메니페스트 데스티니)

 

제임스 녹스 폴크는 미합중국의 국토의 확장에 대해서 매우 의욕적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존 타일러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에도 적극적으로 텍사스의 편입을 위하여 발 벗고 노력 하여 텍사스의 미국 편입안이 의회에서 통과되도록 큰 기여를 하였다.

제임스 녹스 폴크 그 자신도 여러 명의 노예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있었으며, 고향에는 거대한 플랜테이션을 가족들과 공동 운영 하였기에 제임스 녹스 폴크의 텍사스 미국 편입 지지는 남부 주들이 노예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은밀히 지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많았다.

 

 

하지만 제임스 폴크는 남부 주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 텍사스 주의 미국 편입을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다고 보기 보다는 자신이 미국의 국토 확장에 매우 큰 욕심이 있었기에 텍사스 주의 미국 편입에 적극적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제임스 녹스 폴크는 미국의 대서양부터 태평양까지의 확장을 ‘Manifest Destiney’ (메니페스트 데스티니) , 미국의 명백한 운명이라고 믿었다.

잡지 편집자 존 L O' 설리번이 최초로 매니페스트 데스티니 ‘Manifest Destiney’ (메니페스트 데스티니) , 명백한 운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미합중국이 북 아메리카 대륙의 전체를 통합하는 것이 마땅한 운명임을 강조하였다.

 

존 루이스 O' 설리번과 미국의 명백한 운명

 

"Our manifest destiny to overspread the continent allotted by Providence for the free development of our yearling multiplying millions."

우리 자손들이 자유롭게 대대손손 (백만이 되도록 번영하도록) 발전 할 수 있도록 섭리에 따라 대륙에 널리 퍼지는 것이 우리의 명백한 운명이다.(의역 죄송합니다.)

존 루이스 O' 설리번 -John L O' Sullivan- 

 

The Oregon Treaty 오리건 조약

 

제임스 녹스 폴크는 대통령이 되기도 이전 텍사스 주의 미국 편입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제임스 녹스 폴크는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오리건 지역의 편입에 집중을 하기 시작한다.

오리건 영역(오리건 주를 포함한 오리건 영역을 의미한다.)은 러시아 지배의 알래스카 54°40′ 남부와 히스패닉(스페인계) 캘리포니아의 42° 북부를 모두 아우르는 큰 영역이었다.

1844년 제임스 녹스 폴크의 선거 슬로건 자체가 ’54 40 또는 전쟁!’ (Fifty-four Forty or Fight)였을 만큼, 그는 오리건 지역을 포함한 미국 확장에 대단한 욕심을 선보인 대통령이었다.

 

 

오리건 지역은 아주 오래전부터 대영제국과 어느 지역까지가 자신의 영토인지에 대한 영토 분쟁이 있었던 지역이었다.

미국과 대영제국 모두가 콜럼비아 강 이북의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을 해왔는데, 제임스 녹스 폴크는 오리건 조약을 통하여 이 영토 분쟁을 끝내고자 하였다.

1846년 대영제국과 미국 모두 오리건 지역을 둘러싼 영토 분쟁에 대한 협의점을 찾고 오리건 조약을 맺는다.

오리건 조약을 통해 두 국가는 새롭게 오리건 지역을 위도 49° 기준으로 구분하기로 협의하였다. 제임스 녹스 폴크는 오리건 조약을 성공적으로 맺으면서 최초로 미국의 국토를 대서양부터 태평양까지 이은 대통령이 되었다.

 

 

멕시코-미국 전쟁의 발발 & 사무엘 콜트

 

텍사스 주는 공식적으로 미국 연방 소속이 되었다. 하지만 텍사스 주와 멕시코 사이에서 텍사스의 남부 국경을 명확히 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와 멕시코 정부간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멕시코 공화국은 뉘에스 강(Nueces River) 이북 지역부터 텍사스 영토라고 주장을 한 반면 미국 연방 정부는 리오 그란데(Rio Grande)이북까지의 영토가 텍사스 영토라고 반박을 하였다.

제임스 녹스 폴크는 멕시코 공화국과의 갈등에서 전쟁의 위험을 감지하고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멕시코 공화국에 위협을 주기 위해 장군의 지휘 아래 미국 연방 군을 리오 그란드에 파견시켰다.

 

Zachary Taylor / 재커리 테일러

 

1846425일 실제로 멕시코 군대와 연방군 사이의 교전이 발생을 하면서 전쟁은 불가피 해졌다.

상원의회에서 40:2 하원 의회에서 174:14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제임스 녹스 폴크는 멕시코 공화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였고, 멕시코-미국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 된다.

에이브러햄 링컨을 포함한 휘그당의 일부 인사들은 제임스 녹스 폴크를 포함한 남부 정치인들이 노예제도를 확대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을 하여 반대하기도 하였다.

 

 

사무엘 콜트는 1835년에 리볼버를 발명하였다. 리볼버 총은 여러 개의 회전하는 실린더에 미리 총알을 장전을 해 두고 한번에 여러 발의 총알을 발사할 수 있는 방식의 총이었다.

당시 한 발의 총알 발사 이후 한 발의 총알을 불편한 과정을 통해 장전해야 하는 머스킷 총이 보편적이었기에, 비록 사거리는 더 짧더라도 리볼버의 발명은 근거리에서 머스킷 보다 많은 화력을 투사할 수 있는 매우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사무엘 콜트는 이미 1842년 사업이 부도가 나버렸던 상태였지만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리볼버를 포함한 군수품 납품으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멕시코-미국 전쟁은 추후 남북 전쟁의 주요 장성들이 경험을 쌓는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율리시스 S 그랜트, 조지 미드, 윌리엄 테쿰셰 셔먼과 같은 북군 장성들이나 로버트 E., 제임스 롱 스트리트와 스톤월잭슨과 같은 남부군 장성들이 모두 멕시코-미국 전쟁에 장교로 참전을 하였었다.

 

멕시코 할양지(멕시코 세션) The Mexican Cession

 

미국 연방군은 멕시코 공화국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승승장구를 하며 멕시코 내부로 침투를 하기 시작하였다.

멕시코 연방군이 푸에블라(Puelba)와 멕시코 시티(Mexico City)까지도 침투를 하자 멕시코 흡수론(멕시코 병합론, -멕시코 운동, All-Mexico Movement)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존 C. 칼훈(John C. Calhoun)과 같은 정치인들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국가 설립과정 그리고 국가 정체성을 고려하면 멕시코 병합에 대해 극구 반대하였다.

 

 

제임스 녹스 폴크 또한 이에 동의 하였으며, 더 이상의 멕시코를 향한 침공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멕시코 공화국과의 평화협상을 시작하였다.

18482, 미국과 멕시코 공화국 정부는 과달루페 히달고(이달고) 조약 체결에 동의를 하였다.

멕시코-미국 전쟁은 종료가 되었으며, 과달루페 히달고 조약의 일환으로 멕시코 할양지’ (멕시코 세션, Mexican Cession)이라고 불리는 조항이 발동 된다.

미국 정부는 500,000 제곱 마일(1,300,000 km2)에 이르는 영토를 천 오백만 멕시코 달러를 지불하고 구입을 한다. 멕시코 할양을 통해서 미국 정부는 루이지애나 구입(Louisiana Purchase) 만큼의 국토를 편입하게 된다.

 

,  과달루페 히달고 조약

 

Frederick Douglass 프레드릭 더글라스

 

프레드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은 미국계 아프리카인들 중 최초로 그리고 매우 적극적으로 노예제 폐지 운동 (Abolitionist Movement)에 참여를 한 운동가였다.

프레드릭 더글라스는 미국 노예,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Narrative of the Life of Frederick Douglas, an American Slave’ )를 출판한 작가이기도 하였다.

 

Frederick Douglass 프레드릭 더글라스

 

프레드릭 더글라스는 미국 노예,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이 노예로서 겪었던 삶의 경험과 미국계 아프리카인 노예들이 겪는 처참한 현실과 이를 외면하는 불편한 현실에 대해 낱낱이 고발을 하였다.

프레드릭 더글라스는 메리랜드에서 도망을 친 노예였으며, 추후 그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정책에 대한 자문을 하는 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프레드릭 더글라스는 또한 에이브러햄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이후 미국 남북전쟁의 정당성을 알리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미국 남북전쟁 참전을 독려한 모병가가 되기도 하였다.

 

“ 미국 노예 ,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 ”(‘Narrative of the Life of Frederick Douglas, an American Slave’ )

 

아멜리아의 블루머 (Amelia’s Bloomers) 

 

19세기 동안 코르셋은 여성들이 착용해야 하는 매우 보편적인 의상이었다.

허리를 매우 꽉 조여 옭아매는 코르셋은 여성들의 장기에도 영구적인 손상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동적인 활동을 함에 있어서 큰 제약을 주기도 하였다.

아멜리아 블루머(Amelia Bloomer)은 여성 인권에 대해서도 큰 목소리를 높인 여성 운동가였다.

아멜리아 블루머는 여성 인권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본 따 블루머(Bloomer)이라고 불리는 하의를 만들어 냈다.

 

아멜리아의 블루머

 

블루머는 치마 밑에 입는 통이 넓은 속바지와 같은 개념의 하의로 이 당시 여성은 치마를 입어야만 한다는 개념이 보편적이었기에 대중들은 여성이 바지를 입는다는 개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블루머는 여성들이 동적인 활동도 편하게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었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 나머지 대중들에게 거부를 받았고, 한 세기가 지나서야 여성들이 바지를 입는 것이 보편화 될 수 있었다.

 

 

세네카 폴스 협약 (세네카 폴스 선언) The Seneca Falls Convention

 

노예제 폐지 운동(Abolitionist movement)이 한창 유행을 하기 시작하면서, 여성들의 인권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졌다.

노예제 폐지 운동에 참여를 원하던 여성들은 뉴욕의 세네카 폴스 (Seneca Falls)에 모여 세네카 폴스 협약 또는 세네카 폴스 모임(Seneca Falls Convention)에 참가를 한다.

 

 

세네카 폴스 협약은 미국 내에서 완전한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사안들을 의논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참정권이나 여성 인권에 대한 개선안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였다.

세네카 폴스 협약은 여성들의 투표권에 대한 목소리를 높인 최초의 여성단체들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

 

 

골드 러시의 열기 Gold Rush Fever

 

서터스 포트(Sutter’s Fort, 서터 요새)에서 제임스 마샬은 금을 발견하였다.

1849년로부터 유래되어 포티 나이너(Forty-inner’s)라고 불리는 이들이 급격하게 제임스 마샬이 금을 발견한 캘리포니아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미국의 서부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포티 나이너들을 따라 캘리포니아로 금을 찾아 떠났고, 이 열풍은 골드 러시의 열기라고 불린다.

 

존 마샬의 서터스 포트에서 금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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