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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 History

[USA] - 미국 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 미국 10대 대통령 존 타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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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미국 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  오른쪽: 미국 10대 대통령 존 타일러

 

 

William Henry Harrison 윌리엄 헨리 해리슨

출생: 177329
사망: 4 April 1841
정당: Whig(휘그당)
재임기간: 1841
부통령: 존 타일러John Tyler
별명: Old Tippecanoe 테쿰셰의 항쟁 중 윌리멍 해리슨의 카누 전투에서의 승리에 대한 공로가 별명혀화

 

휘그당 vs 민주당 (Whig Party vs. Democrats)

 

미국의 초기 국가 성립 당시에는 연방주의 정당(The Federalists party)과 민주 공화주의 정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이 주요 정당으로서 자리 매김을 하고 있었다.

연방주의 정당(Federalists)들은 강한 중앙 집권체계를 지향하는 한편 대영제국에 우호적이었던 정당이었다.

하지만 연방주의 정당(Federalist)은 미국이 대영제국과 여러 분쟁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민중들의 지지를 잃었다.

1820년 중반이 되면서 대부분의 연방주의 정당원들(Federalist)은 헨리 클레이(Henry Clay)의 국가 공화당(National Republican Party)의 정당에 흡수된다. 연방주의 정당(Federalist)1835년에 완전히 해산된다.

 

 

 

민주 공화주의 정당(The Democratic-Republican Party)는 존 퀸시 애덤스와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재임 기간 사이에 민주당과 국가 공화당으로 나누어진다. 민주당(Democrats)은 앤드류 잭슨을 지지하는 이들로 구성되었으며, 국가 공화당은(National Republican)은 존 퀸시 애덤스를 지지하는 이들로 구성되었다.

국가 공화당(National Republican)은 곧이어 반-앤드류 잭슨 정치인들을 모두 모아서 연합을 맺고 휘그당(Whig Party)를 창설한다.  

휘그당 (Whig Party)는 반 앤드류 잭슨을 모두 모은 정치 연합으로 시작을 하여 앤드류 잭슨 재임 기간 그를 독재자 앤드류  ‘King Andrew’라고 비난하고 민주당(Democrats)와 대립하였다.

 

휘그당은 반 앤드류 잭슨주의로 인한 정치연합 당이었으며, 결국 내부 갈등을 봉합 못해 해산 된다. 오른쪽은 앤드류 잭슨을 왕으로 비꼰 삽화

 

휘그당의 주류는 연방주의 정당(Federalists)과 국가 공화주의 정당(National Republicans)들의 정치 이념을 받아들였지만, 태생이 반 앤드류 잭슨과 반 민주당 연합으로 여러 정치 이념들이 합쳐진 정당이라서 내부 갈등 또한 심각한 정당이었다.

윌리엄 핸리 해리슨은 휘그당 후보로서 미국 원주민과 미국 연방정부의 여러 전쟁에서 활약을 한 전쟁 영웅이었다. (물론 현 시점에서는 전쟁영웅이라고 하기에는 그릇된 면이 있다.)

그리고 1837년 경제 위기로 인하여 대중들은 민주당이 아닌 휘그당에 투표를 하여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휘그당, 민주당, 공화당(훗날 생길) 소속의 대통령 재임 미국 7대 ~ 미국 16대 대통령까지의 소속 정당을 나타낸 삽화

 

 

최초로 재임기간 도중에 사망한 미국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연설을 하고 백악관으로 돌아가던 도중 예상치 못한 비를 맞게 되었는데, 그는 감기가 걸리고 말았다.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감기는 안타깝게도 폐렴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백악관의 의료진들은 민간요법, 당시 알려진 의학 지식 그리고 심지어는 미국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뱀을 이용한 주술을 동원하여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치료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모든 요법들이 실패를 하고, 윌리엄 핸리 헤리슨은 184144일 사망하고 말았다.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쇼니 족장 테쿰셰와의 전투나 폴른 팀버스 전투에서 승리를 했던 맹장이었지만 당시 의학 기술과 위생 관념은 그가 폐렴까지도 이겨 낼 수 있도록 돕지는 못하였다.

 

John Tyler 존 타일러

출생: 1790329
사망: 1862118
정당: 휘그당(후에 축출됨)Whig
재임기간: 1841년부터 1844
부통령: 없음
별명: His Accidency
His Majesty(왕을 지칭하는 경어)를 비꼬아 우연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 별명화 됨.

 

정당이 없는 대통령: 휘그당과 존 타일러의 갈등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사망소식은 너무나 급작스러웠기에 대중들도 충격 받았지만 존 타일러 또한 큰 충격을 받았다. 존 타일러는 해리슨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그가 투병중이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는 상태였다.

애초에 존 타일러는 휘그당에서 단지 반-앤드류 잭슨 일원이었기에 가입을 한 인물이었으며, 휘그당 또한 내부적인 균형을 위해서 부통령으로 임명을 하였을 뿐, 존 타일러는 휘그당의 정치 이념과 일치하는 정치 사상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휘그당의 총수 헨리 클레이 Henry Clay

 

존 타일러는 버지니아의 플랜테이션에서 성장을 한 미국 남부 출신의 인물이었다. 존 타일러는 주 정부의 권리를 우선시하며, 휘그당의 비주류로서 휘그당과 대적하는 미국 남부 친화적인 정책을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휘그당의 당수인 헨리 클레이(Henry Clay)는 이 상황이 매우 불편하였지만, 존 타일러는 대부분의 휘그당 정책들에 딴지를 걸지는 않고 있었기에 휘그당과 존 타일러의 불편한 관계는 지속 될 수 있었다.

 

존 타일러의 거부권 행사에 대한 기사와 이를 풍자한 삽화

 

하지만 헨리 클레이와 휘그당이 제 3의 미국 연방 은행 설립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시도를 하였을 때 존 타일러는 대통령으로서의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존 타일러의 내각진들은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을 제외하고 모두 존 타일러의 거부권 행사에 대한 반대 의사의 표시로 사임을 해버렸다.

휘그당은 총 두 번이나 미국의 연방 은행 재설립을 위한 법안 통과를 시도하지만 존 타일러는 이 두 번의 시도 모두에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휘그당은 분노에 휩싸여 존 타일러를 당에서 축출을 하여 존 타일러는 당에 속하지 않은 대통령이 되었다.

 

존 타일러의 두번째 거부권 행사에 대한 기사와 이에 대한 휘그당의 반응에 대한 삽화

 

 

텍사스 주 편입 (Texas Annexation) 

텍사스 지방은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미국 연방 정부의 일원이 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텍사스 문제(Texas Question)으로도 지칭되는 노예주와 자유주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텍사스 편입안건은 오랫동안 지연되고 있었다. 텍사스의 지도층은 대영제국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방안을 협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존 타일러는 지지부진했던 마틴 반 뷰렌 대통령이나 텍사스 주 문제를 꺼내기를 꺼려하는 정치인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텍사스의 미국 연방 편입을 추진하였다.

 

텍사스 주 편입 / 텍사스주 편입 반대를 위한 서명 운동, 존 타일러 임기 종료 3일전에서야 텍사스가 미국 연방 소속이 된다.

 

존 타일러는 텍사스의 노예제 찬성을 받아들이고, 텍사스 주 편입 승인을 위한 절차에 돌입하지만 의회에서는 노예제를 문제로 텍사스 편입을 지속적으로 반대하였다.

존 타일러의 임기가 끝나기 3일 전, 다음 대통령이 될 제임스 녹스 폴크와 그의 정치적인 노력으로 의회를 설득하여 마침내 텍사스 주가 미국 연방에 편입될 수 있었다.

 

미국의 텍사스주 편입으로 인한 영토

 

웹스터-애쉬버튼 조약(Webster-Ashburton Treaty)

 

다니엘 웹스터는 존 타일러의 국무부 장관으로서 존 타일러가 미국 연방 은행 창설에 반대권 행사를 할 때 유일하게 사임하지 않은 내각 구성원이었다. 다니엘 웹스터는 사실 대영제국과 중요한 협상을 하느라 사임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다니엘 웹스터는 대영제국과의 캐나다 국경을 둘러싼 분쟁으로 인해서 미국-캐나다 국경을 재설정하는 문제를 협상하는 중이었다.

미국의 대표 다니엘 웹스터와 대영제국의 대표 애쉬버튼 경은 웹스터-애쉬버튼 조약을 통하여 대서양부터 로키 산맥까지 미국과 캐나다 국경을 재설정하였다.

 

미국과 대영제국의 분쟁지역에 대한 지도 : 좌측       웹스터 애쉬버튼조약으로 인해 설정된 캐나다-미국 국경 : 우측

 

미국으로 향한 대규모 유럽인들의 이주

 

1844년과 1854년 사이, 300만명의 유럽 이주민들이 미국에서 정착을 하였다. 특히나 아일랜드와 독일에서만 약 230만명의 이주민 미국으로 건너왔다. 1840년에 들어서면서 아일랜드는 대기근을 겪게 된다.

Phytophthora infestans이라 불리는 곰팡이/균류으로 인해 감자 역병이라 불리 대규모 감자 감염병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감자 역병은 감자를 흑색으로 변질시키고 섭취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동시에 전파력이 매우 큰 감자 감염병이었다.

 

대기근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인해 백만명이 아사하고, 백만명이 아일랜드에서 다른 나라로 이주를 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이 기간 동안 미주로 이주를 하였다.

독일 또한 정치적 분쟁, 종교적 분쟁과 사회계급 분쟁으로 인해 사회 경제 구조에 큰 변화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성된 독일 내에서의 사회적 불안감으로 인하여 많은 독일인들이 미국에 이주를 하게 된다. 독일에서 많은 중산층의 유럽 이주민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한편 아일랜드인에서는 많은 하층민들이 미국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en Poe)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en Poe)는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들 중 한명이다.

그는 살아생전 많은 주목과 관심을 받는 작가는 되지 못하였다. 1841, 그레이엄 잡지(Graham Magazine)에서 에드가 앨런 포의 루 모귀의 살인자(‘The Murders in the Rue Morgue’)가 처음 발간 되었다.

 

 

루 모귀의 살인자는 세계 최초의 탐정 소설로 후에 셜록 홈즈와 같은 탐정 소설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에드가 앨런 포는 수많은 단편 소설들로 유명하였으며, 그의 어둡고 비정한 문체는 그로 하여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가 되는데 기여를 하였다.

에드가 앨런 포는 자신의 특유의 어두운 문체와 더불어 그의 정교한 문장들은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였다.  

 

오리건 트레일(Oregon Trail)

 

 

1843, 수 많은 개척자들이 서부의 오리건(Oregon)을 향해 이주를 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오리건 열기(Oregon Fever)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개척과 이주가 시작 되었다.

오리건으로 향하는 오리건 트레일은 자그마치 2,000mile(마일)로 약 3,200km에 이르면서도 미국 원주민 영역을 통과하고 각종 산과 강을 건너야 하는 등 험난한 경로였다.

오리건 트레일은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상징으로도 불리는 프레리 스쿠너 행렬(Prairie schooner) , 대형 포장마차 행렬이 즐비한 서부 개척시대의 대명사가 되었다.

 

오리곤 트레일의 프레리 스쿠너 행렬 (Prairie schooner) 대형 포장마차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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