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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Der Untergang] - 국방군 인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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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카이텔 (Wilhelm Keitel)

 

빌헬름 카이텔은 독일 육군 원수로 새롭게 전쟁성을 대신하고 3군을 통합 지휘할 국방군 사령부(Oberkommando der Wermacht, OKW)의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국방군 사령부(OKW)는 육해공군의 연합 작전 및 군과 관련된 모든 사항들을 통합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지만 설립 취지에 걸맞은 활약을 하지는 못하고, 행정적인 면모가 매우 강하였다. 총장으로서 활약을 하였다.

빌헬름 카이텔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라고만 대답을 하는 대표적인 국방군의 예스맨이었다. [1] 

 

 

이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는 빌헬름 카이텔을 자신의 개인 참모장으로도 임명하였다.[2] 빌헬름 카이텔은 국방군 총사령부 총장으로서의 지위와 아돌프 히틀러의 모든 요구에 응하였던 점으로 인하여 뉘른베르크 국제 군사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빌헬름 카이텔의 지위 자체가 상징적인 면이 더 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국방군 사령부의 극악무도한 명령들을 최종 서명한 총 책임자와 아돌프 히틀러에게 저항하지 않았던 그의 성향으로 인해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빌헬름 카이텔이 최종적으로 서명한 명령에는 다음을 포함하였다.

 

The Jurisdiction Order: (관할 명령)

이 명령으로 인하여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과 독일의 우방국들이 동부전선에서 벌린 전쟁범죄들에 대해 많은 기소를 철회하였다.

 

The Guidelines for the Troops: (사병들을 위한 지침)

이 사병들을 위한 지침은 독일군들이 유태인들을 향한 적개심을 정당화하고, 독일군이 SS(친위대)반인륜적인 작전들을 위한 협력을 명령한 지침이었다.

 

The Commissar Order: (정치장교 명령)

소비에트연방(소련)의 군은 장교 이외에도 정치장교를 두었다. 이 정치장교들은 공산당 소속의 장교들로서 소련군의 정훈교육 담당을 하고, 군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공산당원들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은 반공산주의의 일환으로도 소련을 침공하였는데, 이 정치장교 명령은 정치장교들을 포로로 대우를 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처형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명령으로 인해 소련은 더더욱 빌헬름 카이텔이나 알프레드 요들과 같은 이들의 사형을 선고하도록 압박하였다.)

 

Night and Fog Decree: (밤과 안개 명령)

이 명령은 정식으로 군복을 착용한 레지스탕스나 저항군 또는 특수 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들도 전쟁 포로 대우가 아닌 즉결 처형하도록 내린 명령이었다.

군복을 착용한이 요점인데, 모든 전쟁 포로들의 대우에 대한 나라들의 협의를 다룬 제네바 협약에서는 현재도 적국의 군복또는 변장을 한 요원들의 보호를 보장하지 않는다.

의아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런 경우에서 붙잡힌 요원들은 전쟁포로로서의 대우를 반드시 해야 할 명분이 없는 셈이다. 밤과 안개 명령은 정식 군복을 착용한저항군이나 요원들에 대해서도 처형하고 고문할 명분을 준거 t이다. [3]

결국 빌헬름 카이텔은 국제 뉘른베르크 전쟁범죄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군인으로서 최후의 명예인 총살형을 받지도 못하 교수형으로 19461016일 처형되었다

 

 

 

Alfred Jodl(알프레드 요들)

영화 몰락에서 짧은 시간만 등장하지만, 알프레드 요들은 아마도 시각적인 고증이 가장 잘 안 된인물일 것이다. 알프레드 요들은 국방군사령부(OKW)의 참모총장으로서 빌헬름 카이텔의 밑에서 국방군 사령부의 실질적인 업무를 도맡은 인물이었다.

알프레드 요들은 육군 최고 사령부의 인물들과도 두루두루 잘 지냈으며, 매우 유능한 장교였다. 실질적으로 알프레드 요들은 독일 군부의 전략에 모두 기여를 하였으며, 국방군 사령부와 육군 사령부의 갈등 조율이나 타 군의 사령부의 장교들을 설득하여 합동 작전을 수립하는 등 대외 협력적인 면에서나 실질 작전 입안의 면에서 군사적인 유능함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알프레드 요들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몇 안 되는 장교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알프레드 요들은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반감으로 맞서기 보다는 그에게 충언만 하고 간언을 하지 않는 충신이었다.

 

 

알프레드 요들은 폴란드 침공이나 소련 침공(바르바로사 작전)의 입안이나 국방군 사령부의 잔혹한 명령들을 수행한 인물이었기에 소련은 알프레드 요들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알프레드 요들 또한 반인륜적인 범죄 및 전쟁범죄에 대해 뉘른베르크 국제 전쟁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알프레드 요들 또한 군인으로서의 최후의 명예인 총살형이 아닌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4]

 

Wilhelm Burgdorf(빌헬름 부르크도르프)

빌헬름 부르크도르프는 주로 참모 장교로서의 보직을 지내온 인물이었다. 빌헬름 부르크 도르프는 아돌프 히틀러의 군무관 총장 및 육군인사참모총장으로서 육군의 인사권에 대한 권한을 가진 인물이었다.

빌헬름 부르크도르프는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의 이념에 매우 충실한 인물이었다. 부르크 도르프는 독일의 당시 유력지였던 슈피겔(Spiegel)과의 인터뷰에서 국가의 지도부를 비방하는 장교는 국가사회주의국가(독일 제3제국은 Nazi , 국가사회주의 노동당의 이념인 국가사회주의를 따르는 구가였다.)에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만큼 군의 정치적 중립성 따위는 일체 가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아프리카 군단을 통솔했으며 독일 고위 장교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사막 여우 에르빈 롬멜의 죽음에도 부르크 도르프는 관여하였다. 빌헬름 부르크도르프는 에르빈 롬멜을 직접 찾아가서 에르빈 롬멜이 반역죄로 의심을 받아 비참한 생존을 택할지 명예로운 자살을 할지 강요를 하던 인물들 중 한명이였다.

빌헬름 부르크도르프는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와 몰락까지도 그와 함께한 최측근으로서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이후 한스 크랩스와 같이 히틀러를 뒤따라 자살하였다.[5]

 

Hans Krebs(한스 크랩스)

한스 크랩스는 독일이 재무장을 하기 이전 모스크바 주재 독일 외교 영사관에서 군무관으로서 근무를 하였다.

한스 크랩스는 러시아어가 유창하였으며, 모스크바에서의 경험을 통해 독일 군부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한스 크랩스는 여러 군(집단군--군단-사단 등 할 때의 군) 단위에서 유능한 참모장교로서 크게 활약을 하였다.

방어의 사자발터 모델의 9군의 참모장으로서 한스 크랩스는 찰떡궁합의 호흡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르제프(Rhzev) 지역에서의 반격전을 성공리에 방어하는 등 매우 유능한 장교였다.[6] 르제프 전역은 고기 분쇄기(meat grinder)이라고 불릴 만큼 처절하고 여건이 안 좋은 전투로 악명 높았다.

 

 

한스 크랩스는 빠르게 진급을 하였으며, 독일의 최후의 순간에는 육군 참모총장직을 역임하였다. 194551, 한스 크랩스는 직접 휘하 장교 몇 명과 함께 러시아의 제 1벨라루스 전선군의 최선봉장였던 바실리 추이코프(Vasily Chuikov)과 직접 만나 휴전협상을 직접 시도하였다.(한스 크랩스는 러시아어가 매우 유창하여 이를 직접 진행하였다.)

 

좌: 바실리 추이코프  우 : 한스 크랩스

 

바실리 추이코프는 무조건적인 항복 이외의 조건을 받아 들일 수 없다고 강경하게 대응하였고 협상은 결려 되었다. 히틀러의 자살 이후 그의 후계자가 된 요제프 괴벨스는 도저히 자신의 손으로 항복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괴벨스도 자살을 해버렸고, 한스 크랩스와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또한 쓸쓸히 194552일 자살을 하였다.

 

 

Theodor Ernst Hermann Busse(테오도어 에른스트 헤르만 부셰)

테오도어 에른스트 헤르만 부셰는 세계1차대전에서 호엔춀른령에 따른 기사십자검 철십자장을(Knights Cross with Swords of the Hohenzollern Order) 수여받은 경험 많은 베테랑이었다.

테오도어 부셰는 훗날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원이 극도로 제한 된 바이마르 공화국군에서도 남았으며, 독일의 군사적인 성공을 이끌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울 크림 반도 전역 및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고립된 독일 제 6군을 구출하고자 한 돈 집단군의 작전에서 보좌하였다. 전쟁 말기에 테오도어 부셰는 한때 모스크바 침공의 선봉이었던 독일 제 9군의 사령관으로 임명 받았다.

 

좌측 : 테오도어 부셰는 맨 좌측, 중앙의 인물이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다.

 

하지만 한때에는 모스크바 침공의 최선봉이었던9군의 위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테오도어 부셰는 급조된 비스툴라 집단군의 일부로서 소비에트 연방의 군을 고군분투하며 막고 있었다.

비스툴라 집단군의 일부와 함께 테오도어 부셰의 9군은 게오르기 주코프의 제 1 벨라루스 전선군에 맞서 젤로우고지( Seelow heights)전투에서 나름 선전을 하였다.

젤로우 고지는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곧장 향 할 수 있는 관문중 하나였다. 독일군이 젤로우 고지에서 분전을 하는 사이 소련군들은 이들을 우회하여 베를린으로 진격하고는 베를린을 포위까지 하고 말았다. 베를린이 포위되자 아돌프 히틀러는 테오도어 부셰에게 베를린의 포위를 풀 수 있도록 소련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젤로우고지 ( Seelow heights) 전투

 

이미 테오도어 부셰의 9군은 베를린으로 향하는 요충지를 맡고 있어서 부셰의 9군은 오도 갈 데가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부셰의 9군 남부로 이반 코네프의 제1 우크라이나전선군까지 북상하여 부셰의 9군은 베를린 구출 시도는 커녕 할베에서 소련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이를 할베 포켓이라고 부른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상황 : 9군의 포위 사항 등 확인이 가능하다.

 

히틀러의 사망 이후 발터 벵크의 12군은 사력을 다하여 부셰의 9군을 할베 포켓에서 구출하였고, 이들은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절대 안 된 다는 점을 알았기에 뱅크의 12군과 부셰의 9군은 엘베 강을 향하여 질주를 하였고, 서방의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였다. 부셰는 98세까지 장수를 한다.[7]

 

 

 

Walther Wenck(발터 뱅크)

발터 뱅크는 독일의 군부에서 가장 젊은 장성들 중 한 명이었다. 1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다른 장성급들과는 다르게 발터 뱅크는 1920년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의 육군에 입대를 한 인물이었다.

그는 1939년에서 1942년 사이에는 제 1기갑사단의 작전참모장으로서 활약을 하였고, 이후에는 사관학교에서 사관 육성을 하고, 3 루마니아군의 참모총장으로서 활약을 하는 등 다양한 보직을 겸하였다.

독일의 마지막 순간에 발터 뱅크는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 Oberkommando des Heers)의 작전참모장으로서 임명이 되는 등 그는 빠르게 진급을 하였다. 하지만 소련이 비스툴라-오데르 대공세를 통해 독일의 최후의 숨통을 끊으러 진격해오는 급박한 상황이 되면서 발터 벵크는 비스툴라 집단군의 참모총장이 되었다가 12군의 사령관 직을 맡게 된다.

 

 

발터 뱅크가 받은 최초의 명령은 엘베강으로 진격하여서 서쪽에서 독일로 향해 동진하는 서방 연합군을 막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련군이 베를린을 포위 해버리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아돌프 히틀러는 절박함에 테오도어 부셰의 9, 발터 뱅크의 12군 그리고 펠릭스 슈타이너의 슈타이너 분견군에게 베를린 구출의 명령을 내렸다. 발터 뱅크의 12군은 엘베강을 향해 진격하다 급하게 베를린을 향해 회군한다.

 

12군의 상황 - 미국 제 1군과 소련 5군에 끼여있게 된다.

 

하지만 소련군은 이미 베를린을 향하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고, 발터 뱅크의 12군은 결국 포츠담에서 소련군에게 저지당하고 만다. 히틀러가 자살을 한 이후 발터 뱅크는 부셰의 9군을 할베 포위망에서 구출하고 소련군의 전쟁포로가 절대 되지 않기 위해 서방의 연합군들에게 항복을 하고자 사력을 다하여 엘베 강을 향해 달려서 서방의 연합군들에게 항복하였다.

 

할베 포켓의 전개와 9군 구출 과정

 

Helmuth Weidling(헬무트 바이들링)

1차 세계대전에서 헬무트 바이들링은 비행선(제플린)부대의 지휘관으로 시작하여 포병 장교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그는 다수의 포병 부대를 지휘하고, 86 보병사단장 그리고 41 기갑군단의 군단장으로서 동부전선에서 활약을 하였다. 1945년에는 헬무트 바이들링은 56 기갑군단장으로서 부임을 하였다.

56 기갑군단(이름만 기갑군단이었고, 이미 장비를 완편하지 못한 상태였다.)은 고토하르트 하인리히(Gotthard Heinrici)의 비스툴라 집단군 산하의 테오도어 부셰의 9군의 소속으이었다. 헬무트 바이들링의 56 기갑 군단은 젤로우 고지 전투에도 참여하여 고지 방어 임무를 맡고 있었다.

 

 

9군을 포함한 비스툴라 집단군이 서쪽으로 조금씩 소련군에게 밀려나고 있었던 무렵 195 422, 헬무트 바이들링은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사형을 명령 받는다.

헬무트 바이들링은 자신의 사형 명령의 근거가 오해였음을 해명하고자 베를린으로 향하였고, 히틀러는 오해를 인정하고 사형명령을 철회한다. 하지만 헬무트 바이들링은 베를린지구방어 사령관으로 임명이 된다.

 

 

총통 벙커의 최후의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 받은 무장친위대의 장성(SS 여단 지도자) 빌헬름 뭉케(Wilhelm Mohnke)가 제 1SS 기갑사단 LSSAH 소속 총통 경호대대 800명을 포함한 2000명의 인원, 20 기갑척탄병사단, 9 팔슈름예거(강하엽병, 독일의 공수부대) 사단, 뮌헨베르크 기갑사단, 11 SS 기갑척탄병 노르트란드 사단과 18 기갑척탄병 사단의 잔재 인원들이 헬무트 바이들링에게 배속된다.

주코프의 제 1 벨라루스 전선군은 이미 베를린을 온 힘을 다해 포격을 하고 있었고, 베를린 남부에서는 제 1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베를린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분전하였지만, 히틀러, 괴벨스의 연이은 자살로 인하여 헬무트 바이들링은 결국 무조건적인 항복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바실리 추이코프와 만나 194552일 헬무트 바이들링의 베를린지구 방어 부대원들에게 아돌프 히틀러의 사망과 교전 중단을 방송하게 된다.  

 

 

바이들링은 아래와 같이 방송을 하였고, 소련의 전쟁포로로서 사로잡혔지만 투옥 중 삼아한다.

 

"1945430, 총통께서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을 저버리고 자살하였다. 총통의 명령으로 인하여 저항이 무의미한 상황 속에서도 독일의 장병들은 탄약도 바닥난 상태로 베를린을 위해서 싸워야만 했다. 본인은 저항에 대한 즉각적인 중단을 명령한다. 전직 베를린 지구 방어 사령관 포병 장군 바이들링

“30 April 1945, the Führer committed suicide, and thus abandoned those who had sworn loyalty to him. According to the Führer's order, you German soldiers would have had to go on fighting for Berlin despite the fact that our ammunition has run out and despite the general situation which makes our further resistance meaningless. I order the immediate cessation of resistance. WEIDLING, General of Artillery, former District Commandant in the defense of Berlin”

 

 

Robert Ritter Von Greim(로버트 리터 폰 그라임

로버트 리터 폰 그라임은 제 1차세계대전에서 포병사관후보생으로서 처음 전쟁을 경험하였다. 전쟁이 시작 된 이후, 로버트 리터 폰 그라임은 독일의 전투 비행단으로 전출을 갔고, 그는 전투기 조종사 에이스(에이스 직위는 일정 격추 수를 해야만 주어지는 칭호다)

로버트 그라임은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와 막스 요셉 군사훈장(Military Order of Max Joseph)을 수여 받아서 기사를 의미하는 리터라는 이름과 고귀함을 뜻하는 , von’의 이름을 하사 받았다.

하지만 이런 인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축소된 군부에서 로버트 리터 폰 그라임이 설 자리가 없었다.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정부로부터 리터 폰 그라임은 중국 공군 창설에 도움받을 것을 요청받기도 하였다. 리터 폰 그라임은 잠시 중국에 있었으나 곧바로 1933 헤르만 괴링의 요청으로 인해 첫 조종사 학교를 지휘하고자 유럽에 복귀하였다.

베르사유 조약파기 선언을 한 1935년 이전부터 헤르만 괴링을 포함한 독일 수뇌부는 공군 창설을 비밀리에 준비 하였다.

1934년만 해도 리터 폰 그라임은 소령의 계급 밖에 안 되었지만 독일 공군(루프트바페, Luftwaffe)의 창설에 크게 기여를 한 공로를 인정 받아 빠르게 진급을 할 수 있었다.

 

 

1938년에는 일찍이 공군 준장이 되었다. 리터 폰 그라임은 폴란드 침공, 영국 본토 항공전 그리고 쿠르스크 전투를 포함한 동부전선에서의 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서 여러 번의 항공 전투를 지휘하였다.  

독일의 최후로 막을 내리던 중, 아돌프 히틀러는 리터 폰그라임의 베를린 복귀를 명령하는데, 이 과정에서 리터 폰 그라임의 Fi-156 슈토르히가 격추되어 부상을 겪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는 영화에서도 나온다.)

 

 

히틀러는 리터 폰 그라임을 공군 원수로 진급시켰으며, 자신을 배신한 괘씸한 헤르만 괴링의 뒤를 이은 루프트바페(독일공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을 하였다. 리터 폰 그라임은 오스트리아에서 서방 연합군에게 사로 잡혔으며, 투옥 중 자살을 하였다.[8]



[1] “Wilhelm Keitel.” Liberation Route Europe, https://www.liberationroute.com/stories/30/wilhelm-keitel.

[2] “Wilhelm Keitel.” Encyclopædia Britannica,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Wilhelm-Keitel.

[3]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article/wilhelm-keitel-biography.

[4] “Alfred Jodl.” Encyclopædia Britannica,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Alfred-Jodl.

[5] “Burgdorf, Wilhelm 1895-1945.” [WorldCat Identities], 1 Jan. 1984, https://www.worldcat.org/identities/lccn-n85033612/.

[7] “Busse, Theodor Ernst Hermann August.” WW2 Gravestone, 31 Dec. 2022, https://ww2gravestone.com/people/busse-theodor-ernst-hermann-august/.

[8] “Robert Ritter Von Greim.” Hitler Parody Wiki, https://hitlerparody.fandom.com/wiki/Robert_Ritter_von_Gre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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