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Der Untergang] - 무장친위대 인물 정리
Felix Martin Julius Steiner(펠릭스 마틴 율리우스 슈타이너)
펠릭스 마틴 율리우스 슈타이너는 무장친위대의 창설에 지대한 기여를 한 유공자들 중 한 명이었다.
또한 펠릭스 슈타이너는 무장친위대의 초기 전술과 훈련체계를 도입하여 의욕만 넘치고 쓸모가 없던 폭력배들이 실질적인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펠릭스 슈타이너는 세계 1차대전 참전 경험이 있었으며,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인원수가 제한되었던 독일의 군부에 잔류할 만큼 유능한 인재였다.
하지만 그는 독일 군부를 소령의 신분으로 전역 하고 무장친위대의 전신이 되는 친위대의 V-돌격대 (SS Verfügungstruppe, V-Truppe)에 가입하였다.
펠릭스 슈타이너는 자신이 1차 세계대전에서 눈 여겨 보았던 돌격대(충격군, storm trooper 전술로 기관단총과 기동성을 살린 전술)전술, 최초의 위장무늬 전투복 그리고 체계적인 훈련 루틴을 무장친위대에 도입하였다.
펠릭스 슈타이너는 자신이 맡은 V-돌격대원들의 훈련에 큰 노력을 기울였고, 이후 그의 전투 성과와 무장친위대에 도입한 개념들은 아돌프 히틀러, SS 고위 간부들 그리고 독일 군부에게도 큰 인상을 남겼다.
펠릭스 슈타이너는 최초로 도이칠란트 V-돌격대 부대(Deutschland V-Truppe unit)를 맡았고, 폴란드 침공부터 프랑스 침공까지 모두 참여를 하였다.
슈타이너의 부대는 졸전을 벌인 다른 V- 돌격대 부대들과는 달리 상당히 인상적인 전투 성과를 냈으며, 이 전투 성과는 무장친위대의 창설을 정당화하는 큰 기반이 되었다.
이로 인해서 아돌프 히틀러와 SS의 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는 펠릭스 슈타이너를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펠릭스 슈타이너 자신은 하인리히 히믈러의 야망과 음모가 오히려 무장 친위대의 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처음부터 히믈러를 배척하였으며, 그와 직접적인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독일의 몰락이 가까워지면서 펠릭스 슈타이너는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이 독일을 망치고 있다고 인정을 하기도 하였다.
슈타이너는 자신들의 상관들에게 비굴하게 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성향이었지만 무장 친위대에 대한 애정만큼은 진심이었다고 한다.
1940년, 펠릭스 슈타이너는 새롭게 창설된 5th SS Division(제 5SS 사단) Wiking(비킹, 바이킹의 철자와 동일)의 초대 사단장으로 임명된다.
5 SS 사단 비킹은 노르웨이와 덴마크 자원자들이 구성된 노르트란드 연대(Norrland) , 플랑드르 지방 및 네덜란드 지원자들로 구성된 베스트란드 연대(Westland)와 초기 V- 돌격대의 부대였던 게르마니아 연대(Germania) 등 3개의 다국적 연대로 이루어졌다.
펠릭스 슈타이너와 5 SS 사단 비킹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1 기갑집단의 지휘 아래에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 즉, 소련 침공에 참가를 한다. 소련 침공과 동시에, 독일 육군 사이에서도 5 SS 사단 비킹의 전투력은 많은 칭송을 받았다.
1943년, 펠릭스 슈타이너는 3 SS 기갑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3 SS 기갑군단은 5 SS 사단 비킹(Wiking), 그리고 11 SS 사단 노르트란드 (Nordland, 비킹과 동일하게 독일 국적 이외의 지원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가용 가능한 잡다한 육군 및 루프트바페 지상 요원들로 구성이 되었다.
슈타이너의 3 SS 기갑군단은 곧이어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소탕작전에 투입이 되었다가 추후에는 북부 집단군 소속으로 레닌그라드 전선에 투입된다.[1]
1944년, 소련의 붉은 군대는 ‘바그라티온 작전’(Operation Bagration)라는 이름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한 복수를 위해 대대적인 동부 전선에 공세를 시작하였다.
바그라티온 작전의 목표는 독일 동부 전선의 주력인 중부 집단군의 궤멸이었다. 북부 집단군 또한 소련군의 제 1 발트전선군에 밀려서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점차 서쪽으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슈타이너와 3 SS 기갑군단은 나르바 전투(Narva)와 탄넨부르크선 전투(the Tannenberg Line)에 참여를 하여 최대한 소련군을 저지하고자 하였지만, 소용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붉은 군대의 제 1발트전선군에 밀려서 독일의 북부 집단군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쿠를랜드 포위망(Courland Pocket)에 갇히고 말았다.
슈타이너와 그의 잔재 부대원들은 쿠를랜드 포위망에서 바다로 수송되어 독일 본토로 복귀하였다. 슈타이너는 곧이어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11군(11th Army)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곧 바로 다시 전투에 투입되었다.
1945년 1월, 슈타이너와 11군은 고타르트 하인리히가 지휘하는 비스툴라 집단군의 소속으로 포메라니아 지방의 방어를 명령 받았다.
하지만 소련군이 비스툴라-오데르 공세를 시작하면서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제 1 벨라루스 전선군의 선봉군이 독일 본토로 침공하는 등 급박하게 상황이 돌아가면서 슈타이너는 이들의 전진을 막으라는 명령을 다시 받았다.
슈타이너는 제한적이었지만 붉은 군대를 밀어 냈다가 다시 서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1945년 3월이 되면서 슈타이너의 11군 소속의 부대들은 다른 급박한 전선들에 투입하기 위해 차출되어서 11군은 이미 소멸된 격이나 다름없었다.
1945년 4월 21일, 게오르기 주코프의 제 1벨라루스 전선군의 선봉이 베를린을 포위하고 직접 포격하기 시작하면서 아돌프 히틀러는 펠릭스 슈타이너에게 베를린 구출을 명령하였다.
슈타이너는 여기저기서 긁어 모아진 10,000명의 병력 규모의 슈타이너 집단군(분견군) 사령관으로 임명 되고, 베를린 구출의 명령을 받은 것이다.
펠릭스 슈타이너는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을 의미 없는 자살이라고 칭하며 거부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유능한 자신의 직속 친위대 소속의 슈타이너에게 남은 일말의 희망까지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슈타이너가 공격을 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결국 1945년 4월 27일에 체념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 시작하였다.
히틀러의 사망 이후 슈타이너는 붉은 군대에게 사로 잡혀서는 절대 안 된다는 점을 인지하고 서쪽으로 후퇴하여 미국 군에게 항복을 하였다.
슈타이너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에 초기에 전쟁범죄로 기소가 되었으며, 기소가 철회되었다.
슈타이너는 CIA와 함께 서독의 보안을 위해 협업하기도 하였으며, 그는 범죄 집단으로 규정되고 군인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무장친위대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장친위대 전우회 (HIAG)의 창설에 참여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2]
Wilhelm Mohnke(빌헬름 뭉케)
빌헬름 뭉케는 1931년에 친위대(SS)에 가입을 하였다.
그는 친위대 가입한 이후 아돌프 히틀러를 직접 경호하는 총통경호대(Leibstandarte, LSSAH)의 일원이 되어 히틀러를 경호하는 경호원이 되었다.
그는 친위대에 일찍이 가입을 하고 아돌프 히틀러와 직접적인 인연을 가지게 된 초기 구성원 중 한 명이었다. 총통 경호대는 추후 제 1 SS 사단 LSSAH의 전신이 되기도 한다.
빌헬름 뭉케는 곧이어 무장 친위대의 전신이 되는 친위대의 V-돌격대 소속 총통경호대의 분견 부대의 일원으로서 폴란드 침공에 참전하였다.
1939년 친위대가 일반 친위대와 무장친위대로 분화를 하면서 빌헬름 뭉케는 제 1 SS 사단 LSSAH(제 1무장친위사단)이 창설되고 뭉케 또한 LSSAH의 일원으로서 프랑스 침공에 참전을 한다.
이 때 빌헬 뭉케는 프랑스의 웜호드(Wormhoudt)에서 80명의 영국 전쟁포로의 학살에 가담하기도 하였다.[3]
뭉케는 유고슬라비아 침공에도 참여를 하였는데, 첫날부터 그는 유고슬라비아 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부상을 당했고, 약 1년간 회복을 위해 전투에 참가를 하지 못하였다.
1943년 뭉케는 부상에서 회복을 한 이후 새롭게 창설된 12 SS 사단 히틀러 유겐트(12th SS division Hitlerjugend)의 26 SS 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빌헬름 뭉케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의 공방전에 자신의 히틀러 유겐트 연대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프랑스에서의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였던 캉(Caen)전투에서 뭉케와 그의 연대는 분전을 하였지만, 곧바로 팔레즈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다.
뭉케와 그의 연대가 겨우 팔레즈 포위망에서 탈출한 이후, 빌헬름 뭉케는 제 1 SS 사단 LSSAH의 사단장으로 임명이 된다.
뭉케는 벌지 전투(아르덴 대 공세)에서 선봉을 맡은 제 1 SS 사단 LSSAH의 사단장으로서 참여를 하였으며, 비록 현장에는 없었지만 72명의 미국 전쟁포로들을 학살한 말뫼디 학살의 책임자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미국 법무부는 뭉케가 분명 말뫼디 학살의 책임자는 맞으나 그 자리에 없었다는 점은 참작하여서 뭉케는 직접적으로 말뫼디 학살의 처벌에 대한 대가를 치르진 않았다.
뭉케는 계속해서 LSSAH의 사단장으로서 서부의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또 다시 공습으로 인해 부상을 당하여 회복을 해야만 했다. 뭉케가 부상에서 회복을 한 시기에는 이미 베를린은 포위가 된 절박한 상황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이 신뢰하는 빌헬름 뭉케를 제국 의사당과 총통 벙커의 방어 책임자로 임명을 하였다. 빌헬름 뭉케는 뭉케 분견군이라 이름 지어진 2000명 규모의 부대를 지휘하였다.
독일 제 3제국이 완전히 무너진 이후, 뭉케는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는 소련에서 총 10년을 포로로 복역한 이후 1955년에 풀려났다.
Hermann Fegelein(헤르만 페겔라인)
헤르만 페겔라인의 아버지는 승마 학교를 운영하였고, 헤르만 페겔라인은 이에 영향을 받아 어릴 적 부터 전문적으로 승마 교육을 받았다.
이 승마학교에서 헤르만 페겔라인은 훗날 친위대에서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줄 아돌프 히틀러의 오랜 정치적 동지인 크리스티안 베버(Christian Weber)와 인연을 맺는다.
크리스티안 베버는 비어 홀 폭동이나 장검의 밤과 같은 나치당의 주요 사건들에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히틀러를 위해 더러운 일을 단행한 정치적인 동지였다.
베버는 승마광이었으며, 페겔라인이 친위대에 가입하고 빠르게 진급을 할 수 있도록 후견인이 되어준다.
헤르만 페겔라인은 1930년에 공식적으로 나치당에 가입을 하고 1933년에 친위대에 가입한다. 그는 친위대에 가입하자마자 친위대의 수장 하인리히 히믈러의 눈에도 빠르게 들어왔다.
히믈러는 친위대의 기마 부대인 리터-SS(Rieter-SS)의 수장으로 페겔라인을 임명하였고, 페겔라인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비롯한 나치당을 위해 다양한 승마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기획을 하여 히믈러의 기대에도 부응하였다.
1939년에는 SS 토텐코프 리터슈탄데(SS Totenkopf Reiterstandarte, Deaths-Head Horse Regiment) 즉, 친위대 기병 연대의 연대장으로서 폴란드 침공에 참여한다.
그와 그의 잔혹한 기병연대는 캄피노스 숲 학살로도 불리는 팔미리 학살을 포함하여 유태인과 폴란드 지식인 등 수 천명의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였다.(Palmiry massacre, Kampinos forest massacre)
헤르만 페겔라인과 그의 부대는 일명 친위대를 위하여 ‘경찰’ 임무를 수행하였고, 그는 반인륜적인 범죄, 민간인 학살과 홀로코스트의 책임자로서 심판을 받아야 했을 존재였다.
히믈러의 지원 아래 페겔라인은 소련 침공(바르바로사 작전) 작전에서도 벨라루스의 파르티잔부터 유태인들과 민간인들까지 1942년까지 만 명 단위의 학살을 저질렀다.
1943년 초, 헤르만 페겔라인과 그의 부대는 각각 사단장과 8 SS 기병 사단 플로리안 가이어(8th SS Cavalry Division Florian Geyer)로 승격이 되었다.
페겔라인의 지휘 아래 플로리안 가이아 8 SS 기병사단은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과 파르티잔과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1943년 말, 페겔라인은 최전선에서 빠져나와 하인리히 히믈러의 SS 연락관으로 임명이 된다.
1944년에는 헤르만 페겔라인은 히틀러의 애인의 여동생인 그레텔 브라운(Gretl Braun)과 결혼을 한다.
페겔라인은 이미 난봉꾼으로 나치당에서 악명 높았는데, 많은 이들은 페겔라인이 그레텔과 결혼한 이유는 사랑이 아닌 히틀러과 친인척 관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알베르트 슈페어, 하인츠 링에나 다른 국방군 무관들도 페겔라인의 충성심 부족, 업무 능력 부족이나 그의 난봉꾼 기질 때문에 페겔라인을 싫어하였다고 한다.
페겔라인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암살 시도 당시에도현장에 있었으며, 슈타우펜베르크와 배신자들을 사냥한 장본인들 중 한 명이었다.
소련군이 베를린을 포위하고 독일 3제국의 최후의 날이 다가올 때 즘, 히틀러는 페겔라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페겔라인은 SS 연락관으로서 항시 히믈러와 히틀러가 의사소통 할 수 있도록 히틀러의 곁에 있어야 함에도 며칠간 총통 벙커에서 보이지 않았다.
이를 깨달은 히틀러는 즉시 페겔라인의 체포를 명령하였다.
이미 헤르만 괴링의 배신으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는 광기에 사로잡힌 상태였으며 심지어 헤르만 페겔라인에 대한 수상쩍은 최후 목격담들이 보고된 이후 히틀러는 페겔라인의 배신을 더욱 의심하는 상황이었다.
1945년 4월 27일, 헤르만 페겔라인은 체포되었으며, 그의 수중에는 히믈러와 페겔라인이 서부의 연합군들과 협상을 히틀러 몰래 시도한 증거 또한 같이 발견되었다.
자신의 여동생 그레텔 브라운을 위해 처남인 페겔라인의 목숨만은 부지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한 에바 브라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군사 재판 없이 페겔라인의 즉각적인 처형을 명령하였다.
페겔라인은 그렇게 1945년 4월 28일 처형되었다.
Otto Günsche(오토 귄셰)
오토 귄셰는 1934년 나치당에 가입을 하였으며, 총통경호대(LSSAH)의 일원으로 지원을 하였다.
오토 귄셰가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난 연도는 1936년이며, 그는 곧바로 아돌프 히틀러의 비서와 비슷한 SS 무관이 되었다.
오토 귄셰는 SS 무관으로서 히틀러의 일정 관리, 각 사무소나 일정지에 아돌프 히틀러의 도착을 미리 알리는 역할이나 히틀러가 음식을 먹기 이전 기미상궁 노릇까지도 수행을 하였다.
오토 귄셰는 아돌프 히틀러가 끝까지 신뢰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발빠르게 성장하였다.
오토 귄셰는 이후 친위대 장교 과정을 수료한 이후 제 1 SS 사단 LSSAH의 한 중대를 이끄는 중대장으로서 동부 전선에서 복무를 한다.
하지만 귄셰는 전투 경험을 약간 쌓자마자 1944년 3월에 히틀러의 개인 무관 (Persönlicher Adjutant) 으로 임명이 된다. 오토 귄셰는 항상 히틀러의 곁에 있었기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히틀러 암살 시도 때에도 모든 고막이 터지는 심각한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오토 귄셰는 하인츠 링에와 함께 히틀러와 히틀러의 애인 에바 브라운의 모든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들을 처리하였다.
히틀러는 자살을 하기 이전에 오토 귄셰에게 개인적으로 다가가 자신과 자신의 애인 에바 브라운의 최후를 잘 처리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오토 귄셰는 히틀러의 운전수 에리히 켐프카에게 부탁하여 연료를 마련하고 소련의 붉은 군대가 총통의 신체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총통과 그의 애인을 화장시키고 그들의 최후를 마무리하였다.
오토 귄셰 또한 소련의 최우선 생포 대상으로서 사로잡혔고, 모스크바에서 투옥된 채 여러가지 심문을 받았다. 그는 1956년 석방되고 2003년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다.
Heinz Linge(하인츠 링에, 하인츠 린지)
하인츠 링에는 1933년에 친위대에 가입하였다. 하인츠 링에는 총통경호대(LSSAH)의 일원으로 직접적인 아돌프 히틀러의 경호를 수행하였다.
곧이어 친위대가 일반 친위대와 무장친위대로 분화가 되면서 하인츠 링에는 무장친위대 LSSAH 제 1 SS 사단의 총통 경호 분견대의 소속이 되었다.
하인츠 링에는 이와 동시에 1935년도부터는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시종과 비슷한 비서가 되었고, 추후에는 청소보부터 비서들까지 모두를 담당하는 비서실장과 비슷한 역할이 되었다.
하인츠 링에는 성격이 좋아서 모든 비서들부터 청소부들까지 그의 비서실장과 같은 지위를 존중하였다고 한다.
또한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적인 친구이자 충실한 비서/시종으로서 최후까지 약 10년을 지내었는데, 군부나 나치당의 간부들은 하인츠 링에와 미리 상의를 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기분이 좋은 시간에 서류 결재나 중요 사항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이후 아돌프 히틀러의 사망을 최초로 확인 한 사람도 하인츠 링에 였다. 소련은 히틀러의 죽음이 위장 또는 헛소문이라고 생각을 하였고, 하인츠 링에를 생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결국 하인츠 링에는 소련군에게 붙잡혔고, 곧 바로 모스크바로 이송이 된다.
하인츠 링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사생활부터 모든 면을 알고 있었고 최초로 히틀러의 사망을 확인 한 자였기에 소련은 히틀러의 사망부터 모든 정보를 알아내고자 하인츠 링에를 모질게 고문을 하였다.
하인츠 링에는 1955년까지 많은 고문을 당하였고, 일반적인 협의로 인해 소련에게 풀려났다. 하인츠 링에는 ‘히틀러와 최후까지’라는 자신의 자서전을 발간 하기도 하였다.(With Hitler to the End).
Erich Kempka(에리히 켐프카)
에리히 켐프카는 1930년에 나치당에 가입한 나치당의 초기 일원 중 하나였다.
에리히 켐프카는 나치당에 가입을 한 이후 1932년에 SS(친위대)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때 아돌프 히틀러의 전담 운전수로서 비서실의 일원이 되었다. 에리히 켐프카는 아돌프 히틀러의 검은색 벤츠의 전담 운전수로서 다양한 행사에 참여를 하였다.
켐프카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어느 날 오토 귄셰가 포탄이 쏟아지는 긴박한 상황에서 뜬금없이 200리터나 되는 연료를 요구하였던 날을 회고하였다.
그는 곧 이 짜증 날만한 상황에 20,000리터 이상의 연료로도 부족했을 만큼의 놀라운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다가 오토 귄셰가 죽은 총통과 그의 애인을 화장하기 연료를 요구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에리히 켐프카는 하인츠 링에와 같은 이들과 함께 베를린을 탈출하고자 하였으나 도중에 흩어지고 말았다. 운 좋게도 켐프카는 미군에게 붙잡히고, 별다른 혐의 없이 1947년에 석방되었다.
에리히 켐프카는 자신의 자서전 ‘나는 히틀러의 운전수였다’ ‘I Was Hitler's Chauffeur: The Memoirs of Erich Kempka’를 집필한 이후 1975년까지 생존 하였다.
[1] Fitzgerald, Clare, and Clare Fitzgerald Clare Fitzgerald is a Writer and Editor with eight years of experience in the online content sphere. Graduating with a Bachelor of Arts from King’s University College at Western University. “Felix Steiner: The SS General Who Turned against Hitler.” Warhistoryonline, 24 June 2021, https://www.warhistoryonline.com/war-articles/felix-steiner.html?chrome=1.
[3] “Brigadeführer Wilhelm Mohnke.” Www.canadiansoldiers.com, https://www.canadiansoldiers.com/enemies/mohnk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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