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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Der Untergang] - 그들은 누구인가 정치인 ep3 - 알베르트 슈페어 요제프 괴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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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Der Untergang] - 그들은 누구인가 정치인 ep3 - 알베르트 슈페어 요제프 괴벨스

 

어느 강력했던 문명, 국가나 정치 집단이든, 여러가지 목적으로 건설한 건축물들을 건축 하곤 한다. 남아메리카의 페루에 있는 마추픽추는 잉카 문명의 거대 구조물로서 그 목적조차도 불분명하지만 높은 고도에서 사람의 힘으로 건축된 석재건축물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들은 그 규모만으로도 고대 파라오들의 힘을 엿볼 수 있으며,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은 로마의 야만스러움과 문명인의 모습을 모두 함께 볼 수 있는 구조물이다. 독일 제 3제국의 나치 정권 또한,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인물에 의해 나치 정권의 상징물들이 건축 및 기획 되었다.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는 나치 독일의 형이상학적인 모습을 구축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나치 정당의 상징성을 넣은 건축가였다. 하지만 알베르트 슈페어는 단순히 건축가만이 아닌 나치 정당의 매우 중요한 기여자였으며, 정부 관료로서도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독일의 군수부(Ministry of Armament and Munitions) 장관으로서 부임을 한시기에는 연합국의 전략폭격이나 독일이 군세에 밀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및 산업적인 생산성을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을 시키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1]

 

 

알베르트 슈페어는 1931년에 처음으로 나치 정당에 가입을 하였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아돌프히틀러의 연설을 참관한 뒤, 영감을 받아서 나치 정당에 가입을 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알베르트 슈페어의 재능을 알아본 아돌프 히틀러는 곧바로 알베르트 슈페어를 자신의 개인 건축가로서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였다.

1934, 알베르트 슈페어는 제페를린 펠드(Zeppelinfeld, 제플린 비행장으로도 번역이 되지만, 그런 뜻으로 번역은 오역인것으로 추정한다.)를 뉘른베르크에 건설하였으며, 이 곳은 나치 정당이 대규모 정당 대회를 유치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이 제페를린 펠드에 추가적으로 빛의 대성당’(Cathedral of light’)라는 이름으로 여러 장치를 사용하여 나치 정당 대회의 웅장함을 더함으로 현장은 물론 이러한 정당대회를 보도하는 매체에도 나치 정당 선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빛의 대성당을 설치함에 있어서 헤르만 괴링과의 갈등 또한 있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공군은대공 방어의 임무 또한 수행을 하기에 독일 공군(루프트바페, Luftwaffe)의 최고 지휘관 격인 헤르만 괴링은 대공방어를 위한 탐조등들을 대량으로 사용해야 하는 이 빛의 대성당을 꾸림에 있어서 매우 꺼려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알베르트 슈페어는 독일의 대공 방어망을 약화시키는 악효과를 냈을지 언정, 빛의 대성당을 통하여 대중이나 나치당원들에게 나치정당이 가진 중앙집권화 되고도 단결된 힘의 모습을 선전할 수 있었으며, 이는 나치 정당의 매우 강력한 선전 도구였다.[2]

 

 

알베르트 슈페어는 1937년 열린 파리 국제 박람회에서 선보일 나치 독일의 파빌론(pavilion, 누각, 오벨리스크와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또한 선보이는데 일조를 하였다. 초창기에는 작품을 출품할 예정은 없었으나 급한대로 나치독일을 상징하는 독수리를 주 상징물로 파빌론을 건설하여 파리 국제 박람회에 전시를 하였다.

우연치 않게 같은 파리 국제 박람회 전시장에서. 파블로 피카소는 자신의 걸작인 게르니카를 선보였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스페인의 빌바오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무차별적으로 민간인들을 가리지 않고 폭격을 가한 독일의 공군 콘도르 군단의 잔혹함을 비판하는 작품이었다. 나치 독일을 상징하는 파빌론과 이들의 잔혹함을 일찌감치 경고한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같이 전시되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또한 놀랍게도 소비에트 연방(소련) 또한 노동자들을 찬양하는 상징물을 중심으로 파빌론을 파리 국제 박람회에서 전시를 하였는데, 우연치 않게도 이 2개의 파빌론 모두 파리 국제박람회 전시장의 양쪽 끝에 위치하여 서로를 마치 대적하는 듯한 모습으로 전시가 되었다. 독일 3제국의 나치들과 소비에트 연방의 볼셰비키들의 군사적 정치적인 대립을 마치 암시하는 듯하였다.[3]

 

 

알베르트 슈페어와 아돌프 히틀러는 유럽의 정복 이후, 베를린을 일종의 초호화 거대 도시로 재개발할 예정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제3제국의 최종 목표로 범 독일 민족을 통합하여 천년 제국이라는 이명으로 게르마니아국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러한 천년 제국에 어울리는 수도로 베를린을 재개발하고 싶어하였으며, 알베르트 슈페어는 이에 걸맞는 계획도를 만들었다. 영화 몰락의 주요 장면 중에는 알베르트 슈페어와 아돌프 히틀러가 이 거대한 베를린의 모형을 놔두고 대화를 하는 모습이 묘사 되었으며, 이 거대한 베를린의 계획들은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4]

 

 

독일의 군수부 장관 프리츠 토드(Fritz Todt)는 늑대굴(Wolf’s Lair, wolfsschanze : 아돌프 히틀러가 동부전선의 총지휘본부로 사용하던 장소이다. 작전명 발키리 등 다양한 영화에서도 이 곳이 묘사가 된다.)에서 회의를 한 이후 비행기를 통해 이동을 하면서 추락을 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프리츠 토드의 후임자로 아돌프 히틀러는 알베르트 슈페어를 지목하였다.

프리츠 토드는 이미 군수부 장관으로서 아우토반의 건설, 프랑스의 해안에 건설된 방어선인 대서양장벽(비록 완성을 하진 못하였지만) 서부방벽(일명 지그프리트 선이라고 불렸으며, 이는 독일 본토로 진입하는 길을 방어하는 방어선이었다.) 등 다양한 성과를 내었다. 하지만 알베르트 슈페어 또한 전임자 못지 않게 성공적으로 군수부 장관으로서 여러 성과를 내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신의 자서전 3제국 안에서’(‘Inside the Third Reich’) 다음과 같이 독일의생산성을 높였다고 주장을 하였다.

“In August 1942, according to the Index Figures for German Armaments End-Products, as compared with the February production, had increased by 27 percent for guns, by 25 percent for tanks, while ammunition production almost doubled, rising 97 percent. The total productivity in armaments increased by 59.6 percent.[5]

독일 군수부의 19428월의 완제품의 생산성에 대한 통계자료와 2월의 통계자료를 비교하면, 총의 생산성에 대해서는 27%증가하였으며, 탱크는 25% 증가하였고, 탄약의 생산성은 97% 증가하여 거의 2배로 늘어났다. 군수품의 총생산성은 59.6%로 증가를 하였다.

위 수치에 대해서는 전쟁의 초기 단계에서는 아직 생산시설들이 완전히 가동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생산시설들의 완전한 가동이 이루어져서 정보가 왜곡 될 수도 있다는 의견은 있지만, 전쟁이 진행 될수록 연합국들이 독일의 산업 시설들에 가한 공군의 전략적인 폭격이나 여러 전투의 패퇴로 인한 물자 조달의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1944년 전체 생산성이 정점을 달했다는 점에서 알베르트 슈페어가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고는 하기 힘들다.

 

 

나치 독일의 무조건적인 항복 이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위해서 알베르트 슈페어는 감금 되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감금이 되었음에도 취조나 인터뷰에 아주 적극적으로 응대를 하였다고 한다. 여러 인터뷰를 통하여 알베르트 슈페어는 헨리 포드의 제조공정 원리들을 독일의 공장들에도 적용을 하였으며, 생산 시설들에 대한 나치 당원들이나 고위 군간부들의 영향력을 줄이는 등의 노력을 통하여 독일의 생산성을 높였다고 진술을 하였다.

나치 독일의 몰락이 다가오면서, 아돌프 히틀러는 네로 명령을 명한다. ‘네로 명령은 초토화 작전의 일환(초토화 작전은 적군들이 활용하기 이전에 미리 생산시설이나 주거시설 등 활용 가능한 기반이나 자원들을 없애는 작전이다.)으로 독일이 재기 할 가능성 없이 패망 할 수 있도록 극단적인 결말로 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베르트 슈페어는 군이나 정부관료나 여러 관계인들과 몰래 협업을 하여 독일의 미래를 위하여 이 초토화 명령을 거부하였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이미 이 초토화 명령을 받기 전부터 전쟁에서 패배를 하였다고 직감을 하고 인정하였다고 한다. 영화 몰락에서는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러한 배신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고백을 하는 장면을 통하여 이를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6]

알베르트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처형되지 않은 나치 정당의 최고위 인사였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알베르트 슈페어는 베를린에 있는 슈판다우 감옥에서의 20년형만을 선고받았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나치정당의 선전이나 당원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포로(POW) 나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의 노예화에 대한 혐의만으로 20년형을선고 받았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알베르트 슈페어는 가장 협조적인 인물들 중 하나인 동시에 나치 정당의 범죄에 대해 가장 깊이 반성을 한 인물이었기에 선고가 가벼웠다는 의견이 많다.[7] 또한 알베르트 슈페어의 협조적인 태도 뿐만 아니라 네로 명령과 같은 초토화 명령을 거부했다는 점이 참작 되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8]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요제프 괴벨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요젭프, 요셉 표기는 정확하게 잘 모르겠다)는 악명 높은 선전부 장관이었으며, 비록 하루였지만 히틀러의 뒤를 이은 독일의 수상이었다. 요제프 괴벨스는 1922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독일 문헌학 박사학위를 가진 나치당의 인물이었다. 괴벨스를 괴벨스 박사라고 칭하는 이유 또한 이 때문이다. 요제프 괴벨스는 1924년에 나치정당(NSDAP, 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에 가입한 매우 초창기의 일원 중 하나였다

괴벨스는 나치정당의 초창기 일원이었던 동시에 히틀러가 나치 정당에 가입을 한 이후 히틀러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일원이었다. 1926년에 아돌프 히틀러는 괴벨스 박사를 나치당의 베를린 지역구 지도자로 지목을 하였다.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베를린의 나치당 지역구 지도자로서 괴벨스는 반공산주의와 반유대주의와 함께 나치의 이념을 매우 공격적으로 선전하였다.

 

 

1928, 괴벨스는 독일 의회의 나치당 의원으로서 투표 되었다. 괴벨스의 선전 연설과 선전 기술은 독보적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1932년에 일어날 매우 중요한 대통령 선고와 의회 선거를 치룸에 있어서 괴벨스의 이러한 능력에 크게 의존을 하였다. 비록 대통령 선거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패배를 하였지만, 나치 정당은 더 이상 독일의 소수 정당이 아니었으며, 1932년에는 독일의 최대크기의 정당으로 발돋움을 하였다.

나치당이 독일의 주류당으로서 권력을 잡은 이후, 괴벨스 문화부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국민계몽선전부의 장관이 되었다. 괴벨스에게는 나치독일의 문화와 매체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주어졌다. 매체들에 대해서는 의외로 매우 조심스럽지만 정교하게 통제되었으며, 라디오는 전 가정에 보급이 될 수 있도록 저렴한 가격에 판매가 되었다. 모든 가정에서 편하게 나치당의 선전을 청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33년에는 유태인 저자나 블랙리스트에 오른 저자들이 집필한 책들에 대한 방화(분서)가 괴벨스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괴벨스는 매우 공격적으로 나치당의 정치적인 적들과 유태인 사회에 압력을 지속적으로 가했다. 괴벨스는 지속적으로 한 민족, 한 총통 한 국가의 이념과 전체주의와 더불어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영화 감독이자 배우인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과 협업하여, 1934년의 뉘른베르크 나치 정당 대회의 모습을 찍은 의지의 승리(‘Triumph of the Will’)1936년에 열린 베를린 올림픽을 묘사한 올림피아(‘Olympia’) 등 영화를 보급하는 등 다방면에서 나치당에 대한 선전을 이어갔다. 괴벨스는 나치당에 대한 선전 뿐만 아니라 반유대주의 반 공산주의 등 적대 세력에 대한 공격 또한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

 

 

요제프 괴벨스가 이끈 공격적인 선전과 선동은 유태인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와 간접적인 위해를 일으켰다. 1938, 독일 오스트리아와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덴트란드의 독일계인들은 이러한 선전을 통하여 부러진 유리의 밤또는 수정의 밤으로 알려진 유태인에 대한 폭력 사태를 일으키고 말았다.

요제프 괴벨스는 이들이 유태인들을 공격을 하도록 유도를 하였다.[9]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의 외교관인 에른스트 폼 라트가 한 유태인 청년에 의해 살해된 사건을 악용하여 유태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도록 대중들을 선동하였으며, 이를 통해 일언나 수정의 밤을 통하여 7,500여개의 유태인 운영 사업소들이 공격을 받았으며, 수만명의 유태인들이 강제 수용소에 보내 지는 등 유태인들의 수난이 시작되었다.[10]

 

 

 

1943218일에는 괴벨스는 자신의 연설 중 가장 유명한 연설인 총력전 연설을 하게 된다. ‘총력전 연설은 스포츠팔라트 연설로도 알려져 있으며, (Sportpalast,(체육궁전으로 번역이 된다 또는 Total War speech 총력전 연설) 독일인들에게 국가가 전쟁을 위해 국가의 전력을 집중하여 총력전 체계로의 전환 필요성을 피력한 연설이다.[11] 이 당시 독일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밀리고 있었으며(북 아프리카는 수에즈 운하 등의 전략적인 요충지나 영국의 식민지 제거 및 지중해에서의 연합국 전력 제거, 유전 개발 등 다방면에서 중요하였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의 정예 제6군이 소멸되는 뼈 아픈 패배(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 남부의 유전지대의 확보, 스탈린의 이름을 건 지역이라는 점에서의 정치적인 이유, 볼가강의 해운 등 이유로 대규모의 소련군과 추축국 병력이 격돌 한 전투였다.) 를 겪은 직후였다[12].

괴벨스는 이러한 패배를 부정하기는커녕 인정을 하고, 오히려 이런 위기가 독일인들이 총력전 체게예 임하고 뭉쳐야 하는 이유임을 피력하였다. 이유괴벨스는 이 연설에 참가자를 신중하게 선정하고, 배우들 또한 이용하여 광적인 선전 효과와 환호를 이끄는 등 선전을 위한 설계를 하였다. 이렇게 선택된 연설 참가자들과 배우들은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과장된 감정의 표출이나 정해진 시간대에서의 대규모 박수를 보내는 등 굉장한 군중심리 효과를 이끌었다. 괴벨스는 이 연설을 통하여 전 독일 국민들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끔찍한 결과를 망각하고 총력전에 임하도록 선동하고 말았다.[13]

 

 

 요제프 괴벨스는 악명 높은 바람둥이었지만 자신의 아내 마그다 괴벨스와 아이들은 이상적인 독일가족의 이미지로서 활용이 되었다. 요제프와 마그다의 결혼은 결코 행복만 가득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대중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괴벨스 가족들은 나치당의 초창기부터 완전한 파멸까지 아돌프 히틀러와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1945430일 자신이 자살을 하기 직전에 요제프 괴벨스를 차기 독일 제국의 수상으로 지목을 하였다.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 제국의 수상으로서 끝끝내 항복을 거부하였으며, 결국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마그다 괴벨스 이전의 부인과 낳은 아들만은 현장에 없어서 죽지 않았다.)194551일에 자살하고 말았다.

 



[1] “Albert Speer.” Encyclopædia Britannica,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Albert-Speer.

[2] Rhp. “The Cathedral of Light of the Nazi Rallies in Rare Pictures, 1937.” Rare Historical Photos, 17 Nov. 2021, https://rarehistoricalphotos.com/nazi-rally-cathedral-light-c-1937/.

[3] Laws, Christopher. “Art and Political Crises: The 1937 Paris International Exposition.” Culturedarm, 13 Sept. 2022, https://culturedarm.com/1937-paris-international-exposition/.

[4] “Story of Cities #22: How Hitler's Plans for Germania Would Have Torn Berlin Apart.” The Guardian, Guardian News and Media, 14 Apr. 2016, https://www.theguardian.com/cities/2016/apr/14/story-of-cities-hitler-germania-berlin-nazis.

[5] Speer, Albert. Inside the Third Reich: Memoirs. Sphere, 1971.

[6]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article/albert-speer.

[7] Magazine, Smithsonian. “The Candor and Lies of Nazi Officer Albert Speer.” Smithsonian.com, Smithsonian Institution, 8 Jan. 2013, https://www.smithsonianmag.com/history/the-candor-and-lies-of-nazi-officer-albert-speer-324737/.

[9]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https://www.ushmm.org/collections/bibliography/kristallnacht.

[10]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article/joseph-goebbels-1.

[11] “Joseph Goebbels (1897-1945).” PBS, Public Broadcasting Service, https://www.pbs.org/wgbh/americanexperience/features/goebbels-biography/.

[12] “‘Total War’: The Sportpalast Speech.” PBS, Public Broadcasting Service, https://www.pbs.org/wgbh/americanexperience/features/goebbels-sportpalast/.

[13] Bytwerk, Randall. Goebbels' 1943 Speech on Total War, https://research.calvin.edu/german-propaganda-archive/goeb3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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