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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Der Untergang] - 그들은 누구인가 정치인 ep2 - 헤르만 괴링 마르틴 보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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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몰락에서 아주 짧은 시간 등장하지만,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괴링의 이름을 울부짖었다. 헤르만 괴링이 보낸 하나의 전보를 시작으로, 소위 히틀러가 가장 믿었던 인물들이 연속적으로 히틀러를 배신하면서, 히틀러는 마지막 남아있던 이성마저 잃어간다. 영화 자체에서 등장을 하는 시간은 짧았지만 헤르만 괴링은 하인리히 히믈러, 알베르트 슈페어와 요제프 괴벨스와 같은 인물들과 함께 독일 제3제국의 핵심 정치 인물이어다. 대체 이 못 되 먹은 돼지는 누구였고, 무엇을 하였길래 몰락하는 독일의 중심에서 히틀러로 하여금 그의 이름, 헤르만 괴링을 부르짖게 만들었을까?

 

 

헤르만 괴링은 1940, ‘제국원수’(Reichsmarschall)이라는 직책으로 공군의 총지휘를 맡은 인물이지만, 그의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중요성보다는 정치적인 중요성이 더욱 컸기에 그를 정치인으로 분류를 하였다. 1939년에,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되면, 헤르만 괴링을 다음 총통으로 임명하도록 다른 이들에게 명을 하였다. 실제로 괴링은 히틀러가 유사시 괴링을 다음 총통으로 임명하도록 한 명령을 근거로 히틀러를 열 받게 하는 전보를 보내고, 이로 인해 히틀러의 노여움을 사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구금당했고, 이는 영화에서 재현되었다.

헤르만 괴링은 특이하게도 세계 1차대전 당시의 공군 조종사 에이스(일정 격추 수 이상을 해낸 공군 조종사를 에이스라고 일컫는다.)이었다. 괴링은 초창기에 독일제국의 육군으로 입대를 하였지만, 공군 조종사로 전환을 하였고, 뛰어난 전투실력을 보여 붉은 남작으로도 알려진 만프레드 폰 리히토펜의 죽음 이후 부임한 빌헬름 라인하르트가 또 다시 죽으면서, 이 부대의 지휘를 맡는다.

'붉은 남작' 만프레드 폰 리히토펜의 인생에 대해 그린 영화 붉은 남작과 세계 1차대전 당시 에이스로 활약하던 당시의 헤르만 괴링

 

세계 1차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이후, 괴링 또한 이를 납득하지 못한 인물 중 하나였고, 독일에 염증을 느껴, 독일 국외에서 민간 조종사로 시간을 보냈다. 이후, 괴링은 나치당에 입당을 하면서 돌격대(SA, 초창기에 나치당의 주류 조직)의 지휘관 중 한명으로 임명을 받았다.

1923, 바이에른 주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한 비어홀 폭동에서 히틀러와 나치당과 함께 헤르만 괴링 또한 앞장을 섰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비어홀 폭동 당시, 괴링은 심각한 부상을 당하였고, 비어홀 폭동이 실패로 끝나게 되면서 이 심각한 부상을 안은 채 헤르만 괴링은 오스트리아로 도주를 하였다. 헤르만 괴링은 모르핀 중독자로도 악명 높은데, 이 당시의 부상으로 인해 괴링의 모르핀 중독이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1927년이 되어서야, 괴링은 독일에 돌아왔고, 제국의회에서 나치당이 처음으로 선거로 얻은 의원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게 된다.[1] 나치당의 지지율과 규모는 점점 커져만 갔고, 1932년에는 괴링이 제국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되는 지경까지 이른다. 헤르만 괴링은 이러한 권력을 이용하여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의 정치적 입지를 넓혀가다. 독일내에서 경찰력이나 국방력의 뿌리가 되는 지역인 프로이센(프러시아) 지방의 내무 장관으로도 괴링이 임명되는데, 헤르만 괴링은 이를 이용하여 악명 높은 게슈타포(Geheime Staatspolizei, 비밀 경찰국)의 기반을 닦았다. 비록 게슈타포는 추후 하인리히 히믈러의 SS(슈츠스타펠)에 경찰 중앙화의 일환과 나치당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뺏기지만 괴링은 이를 이용하여 나치당의 정치적인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헤르만 괴링의 이러한 노력들은 독일 내에서 나치당이 유일 당이 됨과 동시에 히틀러의 독재를 인정하는 수권법의 의결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2]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당 내외부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장검의 밤사건 당시에도 헤르만 괴링은 직접 숙청이 필요한 인물들의 목록을 하인리히 히믈러와 의논하여 SS(슈츠스타펠)의 잔혹한 살인 숙청을 지휘하였다.

 

 

괴링은 나치당에서 저지른 반 인륜적인 범죄들과 더불어 홀로코스트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요주의 인물들 중 한명이다. 1939년에는 베르린에 유대인 추방을 위한 중앙 행정처를 설치하는 가 한편, 유태인들에 대한 절멸 계획인 최종해법 (Final Solution)이라는 이명 하에 정부 차원에서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제노사이드(Genocide, 인종청소) 계획 수립을 명령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지휘가 있었지만, ‘최종해법을 수립할 것을 명령하는 명령서에는 헤르만 괴링의 이름으로 서명이 되었다. [3]  이 명령서를 바탕으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를 통하여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실무자들과 더불어 유태인 절멸을 위한 본격적인 계획 입안 및 실행에 옮겼다.[4]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헤르만 괴링    헤르만 괴링의 서명이 담긴 '최종해법'수립에 대한 명령서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군용 공중자산을 갖출 없지만, 괴링은 공군의 총 책임자로서 독일의 공군(루2프트바페, Luftwaffe는 말 그대로 독일어로 공군이라는 뜻이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공군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 처럼도 사용되고 있다.) 의 설립에 크게 기여를 하여다.

하지만 괴링의 거만한 태도와 부족한 전략적인 식견으로 인하여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의 독일공군의 우세함을 자신하거나 스탈린 그라드 전투 당시 공중 보급만으로도 포위된 독일 제 6군을 보급 할 수 있다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호언 장담을 하는 등의 큰 실책이 생겼다. 결국 독일의 공군은 영국 왕립공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영국본토항공전에서 패배를 하였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공군은 포위되어 굶주림에 허덕이던 독일 제 6군을 충분히 보급 할 수 없어서 제 6군의 항복으로 이어져 스탈린 그라드에서 대규모의 독일군이 항복하는 등 악영향을 미쳤다

또한 괴링의 권력 및 무장 욕심으로 인해 공군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육군이나 무장친위대에 보급이 되어야 할 여러 기갑장비가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이라는 이름의 공군 부대에 지급되는 등 물자의 낭비 또한 일으켰다.

 

JU-87(슈투카)의 대열과 스탈린그라드에서의 공군 보급 

 

대전말기에 거만한 태도나 여러가지 오판을 저지르긴 하였지만 헤르만 괴링은 세계 1차대전으로 인해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가질 수 없었던 독일의 공군을 창설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정치적인 수완과 인맥을 통하여 히틀러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였던 데다가 한때 경제부 장관으로서 독일의 산업화에도 기여를 하였다. 헤르만 괴링은 국가 주도로 헤르만 괴링 제국 산업체 (Reichswerke Hermann Göring industrial complex)와 같은 산업체들을 지원하였고, 오늘 날 이 산업체는 독일의 철강 회사 찰츠기터 AG(Salzgitter AG)의 모체가 된다.[5]

 

 

독일 제3제국의 몰락이 다가오면서, 1939년 히틀러가 유사시 헤르만 괴링을 차기 총통으로 임명할 것을 명한 내용을 근거로 히틀러 대신 정권을 잡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었지만, 괴링이 권력욕에서 정권을 잡고자 하였다는 해석보다는 진정으로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히틀러를 우려하여 이러한 시도를 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헤르만 괴링의 이러한 시도를 반역으로 간주하였고, 헤르만 괴링의 모든 지위를 박탈함과 동시에 구금을 시켰다. 이후 헤르만 괴링은 연합국에세 사로잡혀서 헤르만 괴링은 결국 뉘른베르크 국제 군사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전통적으로, 군인들에 대한 처형은 교수형이 아닌 총살형으로 행해졌는데, 교수형은 군인에 대한 매우 큰 모독으로 받아들여졌다. 헤르마 괴링은 자신의 처형을 총살형으로 진행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그의 요구는 묵살되고, 헤르만 괴링은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6] 헤르만 괴링은 한때 명예로운 공군 에이스 조종사와 나치 독일3제국의 고위 관료로서의 지위를 누렸지만 그의 끔찍한 사상과 행동들은 나치 독일의 몰락과 함께 그를 모르핀 중독 거만한 돼지로서 기억이 되게끔 하였다.

 

헤르만 괴링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의 사진    아래 사진은 좌측부터 빌헬름 카이텔, 헤르만 괴링, 아돌프 히틀러, 마르틴 보어만

 

마르틴 보어만은 나치 독일의 막강한 권력자 중 하나였지만, 대중에는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마르틴 보어만은 소위 나치 독일 제3제국의 뒤선에서 모두를 조종하는 ;비선 실세였다. 마르틴 보어만은 원래 루돌프 헤스라는 나치당의 초창기 고위 관료의 비서실장으로서 활동을 하였다. 루돌프 헤스는 아돌프 히틀러가 수감되었을 때 히틀러가 자신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집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비록 여러 가지 이유로 명목만 있었지만, 대외적으로 모두가 나치당의 의전서열 3위로 루돌프 헤스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루돌프 헤스는 그리 정신적으로 멀쩡하지 않은 상태였고, 점점 그의 자리를 마르틴 보어만과 같은 이들이 차지해 나갔다.

루돌프 헤스는 1941, 한창 독일이 영국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돌연 홀로 영국과의 협상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스코틀랜드로 비행기를 타고 영국과 협상을 시도하는 기행을 벌인다. 루돌프 헤스는 영국과의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고 주장을 해왔지만, 별도로 나치당에서 어떤 협상의 필요성에 대해 의논하고 결정을 한 것이 아닌 루돌프 헤스의 독단으로 벌어진 행동이었다[7]

 

루돌프 헤스    우측 : 마르틴 보어만과 루돌프 헤스

 

루돌프 헤스의 부재에 마르틴 보어만은 본격적으로 비선실세로서 날개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1941년에는 나치당의 수장이 되었으며, (워낙 많은 수장지위가 있어서 이는 나치당의 1인자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1943년에는 공식적으로히틀러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 이미 마르틴 보어만은 히틀러의 개인 비서로서 나치당 내에서의 진급이나 인력관리, 히틀러의 개인 일정 등 모든 부분에서 관여를 하고 있었고, 그의 비선 실세로서의 권력은 나치당의 중요 결정에 마틴 보어만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책상 위에 어떤 사안이 올라가기 이전에 마르틴 보어만의 손을 거쳐야 했고, 마틴 보어만은 히틀러의 자산관리부터 사소한 문제들을 모두 도맡았다. 히틀러의 운전수 에리히 켐프카(Erich Kempka)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마르틴 보어만은 히틀러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었고, 이를 이용하여 나치당에서 자신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고 회상을 하는 한편, 또다른 나치 당의 고위 관료인 알베르트 슈페어와 요셉 괴벨스 또한 직접적으로 마르틴 보어만이 얼마나 영향력이 큰 인물아 있는지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다..[8]

 

 

여기까지만 보면 마르틴 보어만은 권력욕만 있던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고, 영화 몰락 내에서도 마르틴 보어만은 크게 악인으로 그려지지는 않지만, 마르틴 보어만은 반유대주의, 반슬라브 주의나 인종 우월적인 측면에서 매우 극단적인 인물이었다. 마르틴 보어만은 이미 가혹한 노동수용소들의 확대를 주도하는 한편,[9] 홀로코스트의 주요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이들에게 더욱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최종해법과 관련하여 히틀러의 중요 서안들을 대중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10] 마르틴 보어만은 반 유대주의뿐만 아니라 슬라브인의 박멸급으로 반슬라브 주의를 표방하였으며, 물리적인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이들을 절멸하는 계획(Euthanasia Program)에도 크게 관여를 하였다.

 

 

하지만 독일의 몰락에도 마르틴 보어만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피고가 없는 상태로(in absentia) 재판이 진행되어 사형을 서고 받는다. 마르틴 보어만은 감쪽 같이 사라진 일로 인하여 여러 음모론이 생기기도 하였지만 끝내 공식적으로 마르틴 보어만을 구금하거나 체포하지는 못하였다.[11] 마르틴보어만의 죽음은 끝내 수수께끼로 끝나는 듯하였으나 1972년에는 그의 유해가 발견이 되었고, 유전자 감식을 통하여 1998년 마르틴 보어만의 죽음이 알려졌다. 하지만 역시 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이는 없기에 아르헨티나로의 도주 등 음로론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1] “Hermann Göring.” Biography.com, A&E Networks Television, 20 Apr. 2021, https://www.biography.com/political-figure/hermann-goring.

[2] “Hermann Göring.” Encyclopædia Britannica,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Hermann-Goring.

[3]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article/final-solution-overview.

[4] “Preparations for the Final Solution Begin.” History.com, A&E Television Networks, 5 Nov. 2009, https://www.history.com/this-day- -history/goering-orders-heydrich-to-prepare-for-the-final-solution.

[5] “Reichswerke Hermann Göring.” DBpedia, https://dbpedia.org/page/Reichswerke_Hermann_G%C3%B6ring.

[6]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article/hermann-goering.

[7] “Rudolf Hess.” Encyclopædia Britannica,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Rudolf-Hess.

[8] (john@spartacus-educational.com), John Simkin. Spartacus Educational, Spartacus Educational, https://spartacus-educational.com/GERbormann.htm.

[9] “Martin Bormann.” Encyclopædia Britannica,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Martin-Bormann.

[11]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en/article/martin-bor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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