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 S. 그랜트 (Ulysses S. Grant) |
출생: 1822년 4월 27일 |
사망: 1885년 7월 23일 | |
정당: 공화당 (Republican) | |
재임기간: 1869년부터 1877년 | |
부통령 : 슐라이어 콜팩스(Schuyler Colfax), 헨리 우리슨 (Henry Wilson) | |
별명: Uncle Sam 샘 삼촌, 미국 정부를 뜻하는 용어 |
● 태평양 철도 건설 법안과 미국의 첫 대륙 횡단 철도
1862년, 태평양 철도 건설 법안이 제정되면서, 미국 대륙 횡단을 할 수 있는 철도를 건설 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 된다.
유니언 퍼시픽 철도 회사(Union Pacific Railroad Company)와 센트럴 퍼시픽 철도 회사(Central Pacific Railroad Company) 2 개의 회사가 미국의 첫 대륙 횡단 열차를 위한 철도를 건설하고자 설립되었다.
유니언 퍼시픽(The Union Pacific Railroad company)철도 회사는 오마하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쪽을 향해 경쟁적으로 철도 건설을 시작하였고,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Central Pacific Railroad Company)는 새크러맨토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경쟁적으로 철도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 철도 건설 자체가 이 두 회사간에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설정 되었다. 서쪽의 철도 건설에서는 중국계 이민자들이 노동에 많이 참여한 반면 동쪽의 철도 건설에서는 유럽계 이민자들과 미국 남북전쟁 참전용사들을 주축으로 건설이 주도되었다.
1869년 5월 10일, 드디어 유니언 퍼시픽과 센트럴 퍼시픽 회사의 철도 건설 지점들이 서로 이어지게 된 날로 이 날 미국의 첫 대륙 횡단 철도의 완공 기념으로 마지막으로 황금 쐐기를 박아 이 두 철도를 잇는 공사가 완공되었다.
● 길디드 에이지 도금 시대의 도래 (The Gilded Age)
남북전쟁의 여파로 인해 미국의 남부 주들은 초토화되었다. 이미 미국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이전 모든 산업화와 공업화 및 자본은 미국 북부에 집중이 되어 있었는데, 미국 남북 전쟁 동안 미국 남부는 이미 기반 시설이 모자란 상황에서 더욱 처참한 경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테쿰셰 장군의 바다로의 행진과 같은 초토화작전은 애틀랜타 도시의 20년을 앗아갔다고 평가가 되기도 하였다.
자본가들과 공장주들은 이러한 미국 남부의 상황을 사업 확장의 기회로 생각하고 미국 남부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남부의 노동력이나 토지를 헐값에 이용하고자 한 북부의 사업가들은 ‘카펫 베거’(Carpe-bagger)라고 일컬었는데 이는 이 사업가들이 들고 다니는 카펫 가방으로부터 유래가 되었다.
이 때부터 자본가들이나 권력자들의 부패가 만연하기 시작하였다. 보스 트위드(Boss Tweed)라는 인물은 뉴욕에서 트위드 서클(Tweed Ring)이라고 불리는 경제-정치 사모임을 만들어서 이주민들에게 세금을 과하게 매겨 배를 불리는 등의 악행이 만연했다.
물론 코넬리우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나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와 같은 미국을 일으킬 기업가들 또한 이 시대를 바탕으로 성장을 하였다.
하지만 이 경제적인 부흥의 시대의 이면에는 이러한 기업가들까지 싸잡아서 ‘강도 남작’ 또는 ‘강도 귀족’이라고 부르며, 자본과 권력을 탐하는 시대상을 비판한 사람들도 많았다.
미국의 유명 작가 마크 트웨인 또한 이 시대를 비꼬아서 도금 시대 즉, 길디드 에이지(Gilded Age)라고 불렀다.
● 검은 금요일(Black Friday) – 우리가 기대 하던 블랙 프라이데이가 아님
최근에는 블랙 프라이데이는 미국의 추수감사절 이전 주의 대규모 할인을 하는 금요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블랙’과 ‘요일’은 매우 암울 하다는 의미에서도 사용이 되는 단어이다.
세계 경제위기였던 대공황의 경우에도 블랙 투즈데이, 검은 화요일을 시작으로 발생하였다고 미국에서는 받아들이는데, 그랜트 대통령 시절의 검은 금요일 또한 대형 경제적 참사 중 하나였다.
율리시스 S.그랜트는 내성적인 사람으로 그 자신은 부패하지는 않은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그 주변 인물들을 관리함에 있어서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강도 귀족의 한 부류였던 제임스 피스크(James Fisk)와 제이 굴드(Jay Gould)는 암암리에 금을 매입하며, 금의 시세를 조작하여 금 시세 차익을 노리고 있었다.
제임스 피스크와 제이 굴드는 가장 많은 금을 매입한 미국 연방 재무부가 개입하면 자신들의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는 점을 알고 있어서 율리시스 S.그랜트의 매제 아벨 코빈(Abel Corbin)을 뇌물로 매수하였다.
율리시스 S.그랜트에게 이 사실이 발각된 이후, 율시시스 S.그랜트는 재무부 장관 조지 바우트웰(George Boutwell)에게 명령하여 4백만 달러 어치의 금을 연방정부 금고에서 시중으로 풀어버리고 말았다. 이로 이해 굴드와 피스크의 계획 또한 물거품 되었지만 미국 경제에도 악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1869년 9월 24일 연방 정부의 어마어마한 양의 금이 시장에 풀린 이후 금 값은 폭락하였고, 이는 전 국가적인 재무 위기를 일으켰고, 이 요일을 일컬어 검은 금요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미국 재건(Reconstruction)과 이를 위한 연방정부 통제의 강화
검은 금요일 사태에 대한 집중을 분산시키고자 한 노력의 일환으로 율리시스 S.그랜트는 앤드류 존슨 전대통령에게 이어받은 미국의 남북 전쟁 이후의 재건사업에 집중을 하였다.
미국 남부에서는 여전히 연방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KKK단(쿠클럭스 클랜, Ku Klux Klan)과 같은 폭력 집단들이 기승을 부려 옛 남부 연합의 정치 이념에 반대되는 이들과 미국계 아프리카인 흑인들을 탄압 하고 있었다.
율리시스 S 그랜트는 1870년 집행법(Force Act of 1870)과 1871년 쿠 클럭스 클랜 법(KKK단 법)을 제정하여 지방 정부 차원에서만 소극적으로 이루어지던 KKK단과 폭력집단 진압을 연방정부 선에서 제압 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안들은 연방정부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KKK단이나 여타 비슷한 집단들이 기승을 부리는 지역에서 계엄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 또한 부여하였다.
● 크레디 모빌리에 스캔들/크래딧 모빌리어 정치 스캔들(The Credit Mobilier Scandal)
대륙 횡단 철도의 개통 자체는 매우 큰 성공이었지만, 이 성공의 의미가 크레디 모빌리에 스캔들 (Credit Mobilier Scandal)로 인하여 의미가 약간은 퇴색되는 타격을 받았다.
크레디 모빌리에 스캔들은 유니언 퍼시픽 철도 회사의 주주들이 몰래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 크레디 모빌리에를 통하여 대규모의 연방정부 자금을 횡령한 사건이었다.
대륙 횡단철도 건설에 연방정부의 투자만 해도 30억 달러규모의 투자금이 들어갔기에 크레디 모빌리에 스캔들은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정당의 다름과 상관없이 약 30명이나 되는 현역 정치인에게서 ‘횡령 정황’이 포착되었지만 이에 따른 실질적인 기소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들로부터 직접적인 횡령에 참여하거나 유니언 퍼시픽 철도 회사로부터 뇌물을 수수 받은 혐의나 이 횡령에 동참하라는 권유를 하는 등 다양한 혐의들이 발견되었다.
이 ‘혐의’로 추궁을 받은 정치인들 중에는 무려 부통령 슐라이어 콜팩스(Schuyler Colfax)와 훗날 미국의 20대 대통령이 될 하원의원 제임스 에이브램 가필드(James Abram Garfield) 등 정치인들도 엮여서 더욱 정치계에 큰 파장이 일었다.
● 1873년 경제위기 (The Panic of 1873)
제이 쿡 앤 컴퍼니 (Jay Cooke & Company)는 미국 재무부 채권에 투자를 하고 북 태평양 철도(노던 퍼시픽 철도, Northern Pacific Railroad)에 투자를 하던 은행이었다.
하지만 제이 쿡 앤 컴퍼니 은행은 검은 금요일 사건으로 인해 폭락한 금 시세와 북 태평양 철도 채권이 인기가 없는 문제로 인하여 큰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결국 제이 쿡 앤 컴퍼니 은행의 모든 거래가 금지 조치 되고 파산 선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제이 쿡 앤 컴퍼니의 파산 사태로 인하여 수많은 뱅크 런(대규모 인출 사태)가 발생해 버렸고, 이로 인해 수많은 기업과 은행들이 파산하고 주식 시장이 무너지는 등 1873년 경제위기 사태로 확대되어 버리고 말았다.
수백만명의 실업자들이 발생을 하였고, 수많은 정치 스캔들(놀랍게도 대통령이 직접 개입은 하나도 되지 않았다.)이 발생하고, 시카고 대화재로 인한 민심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뉴욕이나 볼티모어 등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 대규모 시위들은 주 방위군에 의해 탄압되는 등 여러 모로 율리시스 S.그랜트에게 큰 위기들이 발생하였다.
●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치 스캔들들
윌리엄 리처드슨(William Richardson)은 조지 바우트웰을 이어서 1873년 미국 재무부 장관의 자리를 잇는다. 1873년 경제 위기로 인하여 전국이 신음을 하고 있는 동안 윌리엄 리처드슨 스캔들이 또 터지면서 대중들의 분노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윌리엄 리처드슨은 자신의 친구인 존 D. 샌본(John D. Sanborn)에게 체납 세금을 회수하는 직책에 임명한다. 체납 세금 회수는 현재도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문제는 윌리엄 리처드슨은 샌본에게 무려 회수한 체납 세금의 절반을 샌본이 가져갈 수 있도록 불법 거래를 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샌본은 부당한 이득을 취하였고, 리처드슨과 샌본 모두 이 스캔들로 인해 사임을 하였다.
곧바로 재무부 장관직을 이어받은 벤자민 브리스토우(Benjamin Bristow)는 재무부 장관직을 이어받자마자 연방 정부에서 주류세를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주류세를 조작하여 주류 유통업자와 주류 생산자들과 함께 이를 함께 나눈 점을 밝혀내게 되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진 부패 정황들과 함께 1873년 대위기로 인해 민심은 바닥을 찍고 말았고, 힘으로 제압이 필요한 시위로도 이어졌다.
1876년 전쟁성 장관 윌리엄 벨납(William Belknap)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미국 원주민 보호 구역에서 부당한 뇌물 수취를 하는 정황이 포착되어서 의회에서 조사가 들어가기 이전 윌리엄 벨납이 사퇴하고 조사를 회피하는 사태 또한 벌어졌다.
율리시스 S.그랜트 대통령은 비록 부패한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의회에 ‘이 일련의 사태들은 파단의 오류로 인한 것이지 의도된 것은 절대 아니다’고 해명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Failures have been errors of judgement, not of i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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