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A] - 미국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 - 파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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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 History

[USA] - 미국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 - 파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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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ysses S. Grant


Birth: 27 April 1822
Died: 23 July 1885
Party: Republican
Presidency: 1869 – 1877
Vice President: Schuyler Colfax, Henry Wilson
Nickname: Uncle Sam

 

● 갈레나의 도살자(The Butcher of Galena)

율리시스 S.그랜트는 일리노이 주 갈레나에서 태어났다. 그랜트는 하는 수 없이 금전적 이유로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그 또한 그 자신이 군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으며 매우 내성적인 인물이었다.

율리시스 S. 그랜트는 1843 졸업반의 일원으로서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멕시코-미국 전쟁에도 참여를 하였지만, 부임지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성격 문제로 인한 알코올 중독 등으로 결국 추후 전역을 신청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율리시스 S.그랜트는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다시 전시임관 대령으로서 재 입대하여 능력을 발휘하였고, 빅스버그 포위전 등의 승전을 통해 이전에 조지 워싱턴만이 올랐던 미국 군대 최고 사령관직을 맡게 된다.

율리시스 S.그랜트는 매우 끈질기고 지속적인 공세를 취하는 전략으로 유명하였는데, (이는 공세에 소극적이었던 장성들과 대조적이었다.)

실상은 자기의 스테이크에서 나오는 육즙에도 환멸감을 느껴 고기를 바짝 익혀 먹거나 자신의 고집으로 내보낸 병사들의 죽음에 혼자 눈물을 훔치던 매우 내성적인 인물이었다.

 

 

이는 대중들이 그를 무자비하고 집요한 장군으로 칭송하여 갈레나의 도살자라고 부른 것과는 매우 이질적이었고, 훗날 대중들의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과 전화기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영국, 프랑스의 파리, 캐나다를 거쳐 1872년 미국의 보스턴 대학교에 강의를 강의를 하는 교수가 되었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음파의 진동을 기록 추적할 수 있는 축음기를 만들 던 도중, 이 기술을 이용하면 전선을 통해서 전달된 전파를 통해서도 소리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의 축음기에서 영감을 받아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기계공 토마스 왓슨과 함께 작업을 하여 18763, 최초의 전화기를 발명하게 된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곧바로 특허 번호 174,465로 미국 특허청에 이 전화기를 등록 한다. 곧바로 전화기의 수익성을 눈치챈 웨스턴 유니온 텔레그래프(Western Union Telegraph) 또한 유사한 특허를 등록하게 된다.

훗날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대형 회사인 웨스턴 유니온 텔레그래프와의 전화기를 둘러싼 특허 법정 분쟁에서 알렉산더 그레잉머 벨이 승리를 하고 전화기에 대한 수익권을 보장 받는다.

 

 

추후에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벨 텔레폰 컴퍼니(벨 전화기 회사)를 설립하는데, 훗날 이 벨 텔레폰 컴퍼니의 자회사인 아메리칸 텔레폰 & 텔레그래프 컴퍼니에 오히려 합병이 된다.

이 아메리칸 텔레폰 & 텔레그래프 컴퍼니(company American Telephone & Telegraph Company)는 현재 AT&T로 불리는 대형 통신사의 유래가 된다.  

 

 

 

● 마크 트웨인 Mark Twain

미국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가들 중 한명이 바로 사무엘 랭혼 클레멘스(Samuel Langhorne Clemens) ,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다.

사무엘 랭혼 클레멘스 (Samuel Clemens)는 마크 트웨인의 본명으로 그는 미주리주의 한니발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사무엘 랭혼 클레멘스는 마크 트웨인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작품을 출간 하였는데, 여러 경제적 어려움으로 그는 많은 직업을 가졌고, 틈틈이 자신의 작품 출간에 힘을 썼다.

 

 

1876년 톰 소여의 모험(The Adventures of Tom Sawyer)부터 1881년 출간한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 그리고 1884년 출간한 허클배리 핀의 모험(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은 미국 문학 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에도 큰 영향을 펼친 작품들이 되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톰 소여의 모험에서 미국 원주민 혼혈 조의 악행으로 인한 미국 원주민 증오설 등 일부 논란도 있지만 마크 트웨인은 당시 시대상을 거스르는 정치관과 도덕관념을 가졌다. 마크 트웨인은 반인종차별주의(비록 현대적인 관점에서 강한 것은 아니지만), 여성 운동지지, 반 제국주의 및 반 극단적인 기독교 맹신론적인 관점을 지닌 선구자였다.

 

마크 트웨인과 니콜라 테슬라

 

또한, 마크 트웨인은 여러 이상한 방면에서 역사의 일부가 된 인물이었다. 마크 트웨인은 몇 안 되는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의 친구였으며(니콜라 테슬라 Nikola TeslaAC 발전기 교류 발전기의 발명자이다.)

율리시스 S.그랜트 대통령 시기에 활약하고 직접 그의 자서전 출간에 도움을 주고 그랜트 사망 이후 자서전 출간을 마무리 지어주는 인연을 가지기도 하였다.

 

 

또한 마크 트웨인은 브래지어 끈 또는 브래지어 후크로 불리는 부위를 발명한 인물이었다.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아내가 편리하게 속옷을 입고 벗을 수 있도록 브래지어 끈을 개발하였는데, 이는 미국 특허청에 특허번호 121,992번으로 등록되었다.

여담으로 마크 트웨인은 브래지어 끈의 발명이 큰 상업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내가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작품에나 매진하라는 조언을 받아 집필 하여 출간한 작품이 톰 소여의 모험이다.

 

미국 특허청에 등록 된 마크 트웨인의 브래지어 후크 

 

● 부커 T 워싱턴 (Booker T. Washington)

부커 탈리아페로 워싱턴(Booker Taliaferro Washington)1900년 초 1800년대 후반 가장 영향력 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흑인이었다. 부커 T 워싱턴은 버지니아 출생의 노예였지만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으로 인해 자유를 얻은 인물이었다.

부커 T 워싱턴은 자유민이 된 이후부터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자금을 모아 햄프턴 교육재단(Hampton Institute)에 등록하여 교육을 받고자 하였다.

부커 T 워싱턴은 교육의 중요성과 재정적인 중요성만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인권을 신장 할 수 있다는 실력양성론자였으며, 그 자신 또한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교육을 받기 위해 매우 노력을 많이 한 인물이었다.

 

 

그의 노력을 알아본 햄프턴 교육재단의 이사장 사무엘 암스트롱(Samuel Armstrong)의 추천으로 부커 T. 워싱턴은 앨라배마의 터스커기(Tuskegee) 지역의 작은 학교장으로 부임하는데, 이 곳이 바로 그 유명한 터스커기 재단이 된다.

188174일 미국의 독립 기념일에 부커 T. 워싱턴은 합법적인 교육재단으로 선포됨과 동시에 부커 T. 워싱턴은 학교장으로 부임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위한 교육에 힘을 쓰게 된다.

현재 터스커기 재단은 터스커기 대학교로서 이 명맥을 이어받았다.

이 터스커기 재단 근처에 비행교육장을 설치하여 332 비행대대 레드 테일즈(Red Tails) 세계 2차대전에 활약하기도 하였고, 터스커기 에어맨이라는 이명을 여기에서 이어받았다. 터스커기 매독 사건 또한 이 근방에서 이루어져서 그 이름을 안타깝게도 이어받기도 하였다.

 

 

부커 T. 워싱턴은 훗날 애틀란타 타협 연설로도 불리는 애틀랜타 엑스포 연설을 하게 된다. 이 연설은 미국 남부 주의 거주민들과 미국 아프리카계 미국인 흑인 사회의 조화와 화합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미국 역사상에서도 중요한 연설이었다.

물론 부커 T. 워싱턴 그 자신이 흑인과 백인 사회 사이에 구분과 분단을 주장하는 등의 현대적 관점에서의 흑인 인권 평등과 관련된 논란이 있지만, 부커 T .워싱턴 그 자체가 느린 접근, 서서히 이루어지는 융화를 주장했다는 점을 감안 해야 한다.

부커 T.워싱턴의 연설은 당시에도 정치색이나 피부색을 막론하고, 미국 사회의 화합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지지를 받았다.  

 

의역하면 지금 일단 너가 가진 편견을 내려 놓아라고 할 수 있다.

 

"Cast down your bucket where you are"

 

 

1875년 시민권 법(The Civil Rights Act of 1875)

공화당원들이 주도한 미국 남북 전쟁 이후의 미국 재건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 바로 1875년 시민권 법(Civil Rights Act of 1875)이다.

1875년 시민권 법은 미국의 남부 주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시민권이나 기본 권리를 주지 않기 위해 세운 주립 법들에 대한 대응으로 연방 정부 차원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동등한 인권과 시민권을 보장한 법이었다.

1875년 시민권 법은 특별히 호텔이나 식당 등 공공장소에서 흑인과 백인의 구분을 금지하는 등의 조항을 포함하였지만, 훗날 대법원은 18831875년 시민권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고, 이 판결 이전에도 잘 지켜지지 않는 등의 한계가 있었다.

 

 

● 시카고 대화재 (The Great Chicago Fire)   

시카고 대화재는 1871108일부터 1010일까지 3일간 이어진 시카고 시에서 일어난 대화재이다. 많은 이들이 헛간에 있던 소가 등불을 넘어뜨리면서 발생하였다고 믿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다.

이로 인해 소가 뒷발차기로 불을 일으키는 묘사가 미국 매체에서 많아졌다. 당시 건물들은 아직도 목재로 건설된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의 소방서들이나 소방설비 또한 넉넉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렇다 보니 시카고 대화재는 겉잡을 수 없이 커졌고 3일 동안이나 지속 되었다. 시카고 대화재로 인해 9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잃었고, 많은 인명과 재산이 손실되었다.

미국의 주요 도시인 시카고 재건설에 많은 자본이 투입되어야 했고, 이 또한 1873년 경제 위기 동안 매우 큰 부담 요소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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