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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 History

[USA] - 미국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 파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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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Jefferson 토마스 제퍼슨


출생: 1743년 4월 13일 
사망: 1826년 7월 4일 
정당: Democratic-Republican(민주-공화당)
재임기간: 1801년부터 1809년
부통령: Aaron Burr(아론 버), George Clinton(조지 클린턴)
별명: Red Fox(붉은 여우)

 

Louisiana Purchase 루이지애나 구입

1600년대에 스페인은 북 아메리카의 로키 산맥부터 미시시피강까지의 지방들을 탐험하고 스페인령으로 선포를 하였다. 스페인에 이어 프랑스 또한 미시시시피강 동부 지역의 뉴 올린스(New Orleans)를 개발하고 식민지화 시켰다. 1800년대에 이르러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스페인은 강제로 미시시피강 유역에서 로키 상맥까지의 영토를 울며 겨자 먹기로 넘겨야만 했다. 이를 통 틀어 루이지애나 전역이라고 불렀다.

 

루이지애나 구입의 체결

 

이미 스페인과 미국 사이에는 미시시피강의 수운과 교통을 통행세 없이 통행이 허가되도록 협의가 되었으나 프랑스로 이 영토가 넘어간 것이다. 이로 인해 튜마스 제퍼슨은 미국의 서부 개발의 핵심이자 미국 경제와 교통을 담당하는 미시시피강의 통행권리와 이용에 대한 우려하기 시작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은 로버트 리빙스턴과 제임스 먼로를 프랑스에 파견하여 프랑스 정부로부터 미시시피강의 해운의 통행세에 대한 협상과 유사 시 프랑스로부터 뉴 올린스의 구매에 대해 협상하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프랑스는 통행세에 대한 논의나 뉴 올린스의 판매가 아닌 뉴올린스부터 로키 상맥까지 이어지는 루이지애나 전역에 대한 판매를 역으로 제시하였다.

 

루이지애나 전역의 크기와 기존의 미국 영토 크기 비교

 

루이지애나 전역의 면적에 대한 대가는 당시 1,500만 달러 규모로 이는 면적 1에이커 (1 acre 1 에이커는 약4,000㎡이다) 당 고작 4페니의 대가로 (penny 0.01 dollar이다.) 로 미국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토마스 제퍼슨은 프랑스정부의 역제안을 전해 듣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은 두 번 다시 이러한 협상 조건의 거래가 불가능 함을 인지하였고, 루이지애나 전역에 대한 구입안을 반드시 통과시켜야만 하였다. 여태껏 토마스 제퍼슨은 라이벌 알렉산더 해밀턴 Implied Power(묵시적 권한) 정책과 강력한 정부에 개해 반대를 해왔으나, 혹여나 프랑스 정부가 제시한 조건을 바꿀까 대통령으로 서의 권한 그 이상을 사용하여 루이지애나 구입에 대해 의회의 승인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독으로 강행하였다.

루이지애나 구입을 통해 미국의 영토가 2배로 늘었을 뿐만 아니라 미시시피강 유역을 국토로 편입시켜 미시시피 강 해운 대한 타국의 간섭이 생길 여지 또한 없앴다.

 

종교의 자유

토마스 제퍼슨은 현대적인 관점에서도 선구적으로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관점을 가진 대통령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초기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유의 개념의 확장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를 한 정치인이었다. 토마스 제퍼슨은 자신의 고향인 버지니아 주에서 종교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공식으로 보장하도록 법안 입안에 이바지하였다.

 

 

1786, 버지니아 주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하였다. 해당 법안에 따라 모든 시민들은 자신이 원하는 교회를 선택할 권리를 가졌고, 교회를 가지 않아도 되는 권리 또한 보장하였다. 이에 대해 이단이라는 비판과 비난도 있었으나 토마스 제퍼슨은 예수님의 종교적인 포용을 항상 존경하였으며, 종교의 자유가 타인을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토마스 제퍼슨의 묘비 : 미국 독립선언문의 저자이자, 버지니아 주의 종교적 자유와 버지니아 대학교의 아버지를 기리며

 

Dispute with the Federalists 연방주의정당과의 갈등

토마스 제퍼슨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정권교체라는 점에서 미국 정치사적으로도 의의가 있다. 미국 시민들이 연방주의정당의 정책과 강한 공권력에 대응하려 반대 정당인 민주-공화당의 분권주의적 민주 정책을 지지하여 토마스 제퍼슨을 투표로 선출하여 민주적으로 이루어진 정권교체라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었다. 토마스 제퍼슨은 당선되면서 미국 중앙정부의 권력 약화와 몸집 규모를 줄여 나갔다.

 

 

토마스 제퍼슨은 군대의 크기를 줄이는가 하면, 유럽에 파견된 외교관의 절반을 다시 미국으로 불러들이는 등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토마스 제퍼슨 임기 당시 미국의 국가 빚이 반으로 줄어드는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토마스 제퍼슨과 연장주의 정당과의 대은 여전하였다.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토마스 제퍼슨을 골탕 먹이기 위해 깜깜이 지명(Midnight appointment)을 단행하는가 하면 이런 깜깜이 지명에 대응하여 법관의 임명을 미룬 멀버리 매디슨 재판(Marbury vs Madison)은 대법원이 말버리의 손을 들어주며 토마스 제퍼슨의 오른손 메디슨의 임명 거부가 위헌임을 판결하였다. (절대 법무부와 대법원의 판결이나 재판과정이 부당하다는 문맥은 아니다)하지만 연방주의 정당은 아론 버의 음모, 존애덤스의 은퇴와 알렉산더 해밍턴의 사망 등 사건으로 인하여 크게 약화되었다.

 

Aaron Burr 아론 버

1800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연방주의 정당의 대선 후보 아론 버가 토마스 제퍼슨에게 선거에서 패배하였다. 1804년 토머스 제퍼슨은 대통령 재선에 도전 한 반면 아론 버는 뉴욕의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였다. 하지만 아론 버는 뉴 잉글랜드를 본거지로 하는 극렬 연방주의 정당파 집단인 에섹스 준토(Essex Junto)의 지지를 받고자 이른바 아론 버의 음모를 꾸민다. 아론 버는 뉴욕 주지사로 당선되면 뉴욕을 미국으로부터 분리한 이후 매서츄세스와 함께 새오운 연방주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약속을 하고 음모를 꾸몄다.

 

아론 버와 해밀턴의 결투

 

토마스제퍼슨의 오랜 라이벌이자 연방주의정당의 핵심인물인 알렉산더 해밍턴을 지롯한 연방주의정당원들 조차도 아론 버의 음모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울며 겨자 먹기로 아론 버의 선거 운동에 반대를 하였다. 이에 격분한 아론 버는 일명 버-해밀턴 결투(Burr-Hamilton Duel) 로 불리는 결투를 알렉산더 해밀턴에게 신청한다. 이로 인해 아론 버는 결국 알렉산더 해밀턴을 살해하고 살인 혐의로 수배되어 도피하는 신세가 되기도 한다.

 

아론 버 (Aaron Burr)의 초상화

 

기소가 철회되면서 아론 버는 1805년까지 남은 부통령 임기를 지낸다. 아론 버는 결국 뉴욕 주지사 선거에서도 패배하고 이후 영국, 루이지애나와 다시 유럽을 떠돌면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음모를 꾸미다 실패하고 만다. 실제로도 아론 버는 국가 반역죄로 재판되지만 대법관 존 말의 엄격한 헌법 해석 상으로는 위법 사항이 없었기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Barbary pirates 바르바리 해적

캐이비안의 해적 영화 시리즈에서도 북 아프리카의 해적 영주의 세력으로 소개된 바르바리 해적은 북 아프리카 해역에서 활동을 하던 무슬림 해적들이었다. 미국은 이미 예전부터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미국 상선이나 함선들을 약탈하지 않는 조건으로 명목상 통행세라는 이름으로 뇌물을 바치고 있었다. 

 

캐리비안의 해적 속에 묘사 된 바르바리 해적단

 

하지만 트리폴리의 군주가 미국의 통행세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1801년 미국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미국 해군은 전쟁 초기, 바르바리 해적들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 하였다. 바르바리 해적들은 심지어 미해군의 필라델피아 호를 나포하고 필라델피아 호의 대포로 미국 해군을 공격을 가할 정도로 초기에 선전하였다.

 

 

하지만 1805, 윌리엄 이튼 장군의 지휘하에 트리폴리의 더나 항구를 미군이 점령하면서 상황을 종식시켰고 트리폴리의 지도자는 평화 협상을 맺는다. 하지만 이후 10여년 간 미국은 바르바리 해적단의 습격으로 북 아프리카 해역에서 괴롭힘을 당한다.

 

더나 항구는 현재 이집트와 가까운 리비아의 항구이다.

 

LeopardChesapeake attack & Embargo Act   레오파드(레퍼드)함 체사피크함 교전과 1807년 통상금지령(엠바고)

1807 6 22, 영국 전함 레오파드 호는 미국의 프리깃 체사피크 함을 공격한다. 레오파드 호는 검문 검색을 목적으로 체사피크 함에 승선을 요청하였으나 체사피크 함에서 이를 거부하여 함포전까지 이른 것이다. 레오파드 호는 함포공격으로 체사피크함에 약 2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통상 금지령에 대한 만화

 

레오파드호에서 추가적으로 체사피크함에 승선하여 습격을 하면서 체사피크 함에서 추가적으로 4명이 더 사망하였다. 사망한 4명 중 실제로 영국 탈주 선원이 있긴 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이 사건에 대해 규탄을 하고 영국정부에 즉각적으로 항의하며 사과를 요구하였다. 영국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요구에 완강하게 거절을 하였다.

레오파드 체사피크 함 사건으로 인하여 미국에서는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하자는 여론이 끓었다. 토마스 제퍼슨은 직접적인 전쟁보다도 이를 계기로 영국 뿐만 아니라 유럽의 모든 국가들에게 미국의 주권을 무시하지 않고 본보기를 보여 주겠다고 생각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은 의회의 승인과 함께 1807 12, 1807 통상 금지령을 통과시켰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통상 금지령으로 목소리를 내볼려는 미국을 묘사한 만화

 

하지만 오히려 통상금지령으로 인해 오히려 미국이 막대한 경제적인 타격을 입고 만다. 잉여 수출품은 수출되지 못하고 썩어 나가 폐기되고,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하는 등 미국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은 반면 유럽의 국가들은 이 통상 금지령에 대한 반응은 미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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