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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 History

[USA] – 미국 24대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 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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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ver Cleveland 그로버 클리블랜드

출생: 1837 3 18
사망: 1908 6 4
정당: 민주당(Democrat)
재임기간: 1885 ~ 1889(이후 한 번 더 당선)
부통령: 토마스 A. 헨드릭스(Thomas A. Hendrix)
별명: 점보 삼촌(Uncle Jumbo) 덩치가 큰 것을 비유

 

   플레시 vs 퍼거슨 사건 판결 (Plessy vs. Ferguson) – 분리하지만 평등한 원칙 (Separate but Equal Doctrine)

1896 5 18, 미국 대법원은 플레시와 퍼거슨 사건에 대한 최종 판결문을 내린다.

미국 대법원은 미국 남부 지방에서 제정된 짐 크로우 법안들(Jim Crow Laws)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플레시-퍼거슨 사건의 판결은 미국의 백인과 유색인종인들을 차별하는 분리하지만 평등한 원칙(Separate but Equal Doctrine)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었다.

 

 

짐 크로우 법안들(Jim Crow Laws)는 미국 남북전쟁 이후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일명 재건설(Reconstruction)의 시기에 제정된 일련들의 법안으로, 이 짐 크로우 법안들은 식당과 심지어 공동묘지를 포함한 공공장소들과 개인 사유 공간들에서 유색 인종인들과 백인들을 분리하는 것을 허락한 법안들이었다.

1890, 호머 플레시(Homer Plessy)라고 불린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백인 전용 칸의 기차에 탑승을 하였고, 호머 플레시는 하차를 거부하여 짐 크로우 법안을 근거로 체포되고 말았다.

 

 

호머 플레시와 그의 변호인단은 짐 크로우 법안들이 미국 헌법에 위배된다고 주장을 하며 체포에 항소를 하였지만, 미국 대법원은 이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 대하여 다른 피부 색을 가진 이들을 다른 공간에 분리하는 것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결을 하였다.

이 퍼거슨 대 크로우 법안의 판결은 이후 약 80년간 미국의 분리하지만 평등한 원칙 (Separate but Equal Doctrine)유지의 근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셔먼 은 구매 법 폐지골드버그 대 실버라이트 (Goldbugs vs Silverites)

이전 대통령이었던 벤자민 헤리슨은 맥킨리 관세법을 통과시키기 위한 정치적 타협의 일환으로 셔먼 은 구매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연방정부의 금 재고는 1893 4월이 되는 시점에서 거의 1억 달러 미만의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재선되자마자 1893년 경제 위기가 바로 엄습하였다. 그로버 클리브랜드는 재선되자마자 비상 국회를 소집하여 우선 셔먼 은 구매법부터 폐지를 하고자 하였다.

 

 

셔먼 은 구매법을 폐지함으로 인하여 은본위제 금본위제가 마치 동시에 진행되는 듯한 현 상황을 없앨 수 있었다.

계속 연방 정부 차원에서 은를 구매하면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양이 늘어나고 이는 자연스레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진다.

 

 

골드버그 “goldbugs”라고 불리는 동부의 증권 및 은행가와 보수 정치인들은 이미 재산이 많았기에 이들의 재산 가치를 떨어뜨리는 인플레이션이 불리하였고, 실버라이트라  “silverite” 라 불리는 젊은 정치인들과 남부 서부 출신의 농부들이나 개척자들은 이미 진 빛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그래봤자 재계의 배만 불리지만) 은 구매법을 여전히 지지하였다.

 

 

 ● 1893년 경제위기와 월가(월스트리트)로부터의 원조

미국의 1893년 경제위기는 특히나 미국의 철도업계에 큰 타격을 입혔다.

1896년을 기점으로 미국내 철도 산업의 1/4가 사업 운영을 중단한 상태였으며, 미국 철도 산업은 미국 재무계와 미국 증권가의 중심 산업이기도 하였기에, 월가의 증권사들의 자금 또한 유동성이 없어진 상태였다.

 

 

그로버 클리브랜드는 공화당의 지지와 골드버그 즉, 금본위제를 지지한 민주당원들과 함께 셔먼 은 구매법을 폐지시키는데 성공은 하였지만 여전히 미국 연방정부의 금 재고는 연방 정부 재정이 견딜 수 있는 임계점 직전까지 바닥난 상태였다.

그로버 클리브랜드는 J.P 모건(J.P. Morgan)과 같은 증권사와 은행사들의 거물들을 모아 협의를 하여 연방 정부의 금 재고를 채우는 한편, 이들은 정부 채권을 통해 제법 쏠쏠한 이득을 챙기기도 하였다.

그로버 클리브랜드의 이러한 조치들은 정경유착으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지만, 연방 정부 재정의 안정화에도 기여를 하였다.

 

우측 : J.P.  모건

 

● 깁슨 걸(Gibson Girls)

찰스 다나 깁슨(Charles Dana Gibson)이라는 삽화가는 일명콜라병 몸매’ ‘모래시계 몸매라고 불리는 미의 기준을 만들어 미국의 첫 미의 기준으로도 불리는 깁슨 걸을 만들어내었다.

찰스 다나 깁슨은 모래시계나 한국에서는 콜라병 몸매를 지칭하는 듯한 형태로 폼파도르(pompadour)이라 불리는 풍성한 올린 머리 스타일과 자신감 있는 표정과 얇은 허리의 여성 삽화를 그렸고 이는 미국의 미인상으로도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이 깁슨걸 미인상은 거의 한 세기 동안 미국 여성들의 미의 기준이 되었다.

찰스 다나 깁슨은 깁슨 걸만큼 유명하지 않지만 또한 넓은 어깨와 면도를 깔끔하게 한 깁슨 맨의 남성상을 그린 삽화도 그렸는데 이는 당시 남성들이 수염을 기르는 것이 일반적인 남성상이었다는 점에서 파격적이었고, 이러한 깔끔한 남성상의 시초가 되기도 하였다.

 

 

시리얼의 발명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 와 찰스 윌리엄 포스트(C.W. Post)

배틀 크리크 요양원(The Battle Creek Sanitarium)는 당시 미국 내에서 유명한 스파 겸 건강 요양원으로 미시건 주에 위치해 있다.

이 배틀 크리크 요양원은 제칠일안식예수재림교회(The Seventh Day Adventist Church) 라는 교회에서 설립을 한 요양원으로서 제칠일안식예수재림교회 신도들은 비건 식단과 채식주의 식단을 최초로 장려하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제칠일안식예수재림교회 신도들과 배틀 크리크 요양원에서는 동물성 식단을 대체할 식단 개발과 연구에 많은 지원을 하였다.

이런 배틀 크리크 요양원에서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 박사는 콘플레이크를 최초로 발명하였다. 이 존 하비 켈로그 박사의 콘플레이크는 최초의 시리얼이 되었고, 켈로그 박사는 이를 그라노스(Granose)라고 이름 지었다.

 

 

켈로그 박사는 훗날 배틀 크리크 토스티드 콘 플레이크 회사를 설립하였고 이는 현재의 켈로그 회사로 이어진다.

흥미롭게도 현재 켈로그사의 주요 경쟁자인 포스트의 설립자인 찰스 윌리엄 포스트(Charles William Post) 또한 이 배틀 크리크 요양원에서 요양을 하던 중 켈로그 박사의 그라노스를 보고 시리얼 사업의 유망함을 알아보고 그레이프 너트(직역하면 포도 견과류)라는 이름의 시리얼을 만들어서 판매한다.

이 그레이프 너트는 훗날 포스트 회사의 첫 시리얼이 되었다. 이러한 사연으로 인해 찰스 윌리엄 포스트는 존 켈로그의 아이디어를 도용한 것으로 논란이 많이 생겼다.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 – 조셉 퓰리처(Joseph Pulitzer) 대 윌리엄 랜돌프(William Randolph)

윌리엄 랜돌프 하츠(William Randolph Hearts)는 뉴욕 저널(New York Journal)을 인수 한 이후 퓰리처 상의 근간이 되는 조셉 퓰리처의 뉴욕 월드(New York World) 언론사와 경쟁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두 언론사의 세기의 경쟁은 현재 미디어 및 언론 산업의 기본 바탕을 마련하는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언론사들의 경쟁은 일명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이 발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황색 언론이란 보도 사항을 과도하게 과장하고, 자극적인 소재로 둔갑시켜서 극단적인 여론을 형성하여 대중들을 자극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 황색 언론이라는 이름은 노란 아이(The Yellow Kid)라고 불리는 삽화에서 비롯되었다. 노란 아이 또는 옐로우 키드라고 불리던 이 삽화 시리즈는 뉴욕 월드에 처음 출판 되었다가 훗날에는 뉴욕저널에 출판 되었고, 훗날 스페인-미국 전쟁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황색 언론

 

● 1893년 경제 위기(The Panic of 1893) 와 노동 운동

미국의 1893년 경제 위기 중 18932, 필라델피아-레딩 철도회사(Philadelphia and Reading Railroad)가 파산을 하면서 다른 철도 회사들 또한 재정적인 위기를 겪는다.  

철도 회사들은 월스트리트 즉, 월가의 증권사들의 가장 큰 기반이었으며 사실상 미국에서 가장 큰 산업 중 하나였다. 1896년 즈음 철도 사업의 1/4가 운영을 중단하는가 하면 몇 십만명의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철도 산업의 중단은 제조회사들과 유통망에도 악영향을 미치면서 미국의 1893년 경제 위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경제 위기 자체로도 많은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는데, 많은 기업들이 이 경제 위기를 악용하여 근로자들의 임금을 불공정하고 불공평하게 삭감하는 일들도 발생을 하였다.

이러한 근로자들에게 적대적인 환경으로 인하여 이 시기를 전후로 많은 노동단체들과 노동조합들이 생겼다.

 

 

미국 국내 기업들은 관세로 보호를 받고, 수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이민 오는가 하면 남북 전쟁을 전후로 미국 연방정부 또한 기업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기에 기업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이런 상황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리는 기업들에 맞서 미국노동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과 같은 노동 조합들이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 임기 전후로 많이 생겨나고, 노동 운동 또한 활발 해졌다.

 

 

콕시의 군대(Coxey’s Army) 

제이콥 콕시(Jacob Coxey)는 정부 차원에서 공공근로를 장려하여서 실업문제를 해결 할 것을 촉구하였다.  제이콥 콕시는 콕시의 군대라는 이름으로 실업자들을 모아서 워싱턴으로 향한 행진을 하고자 계획하였다.

 

콕시의 군대(Coxey’s Army) 

 

제이콥 콕시는 몇 만명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겨우 500여명만이 콕시의 군대 운동에 참가를 하였고, 제이콥 콕시는 워싱턴에 도착해서 체포가 되었다.

정부 차원에서의 공공근로를 통한 해결책을 요구하고, 노동 운동의 일환으로서 의의는 있었지만 많은 이들은 제이콥 콕시가 사람들의 지지를 노리고 포퓰리즘적인 정치적 활동을 한 것이라고도 평을 하였다.

 

윌슨-고먼 관세 (The Wilson-Gorman Tariff)

그로버 클리브랜드는 자신의 재선 때 관세를 드디어 낮추고자 의도하였다. 하지만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부임하자마자 1893년 경제위기에 대응을 하느라 관세를 신경 쓸 여를이 없었다.

 

 

경제적 위기가 어느 정도 수습하면서 윌리엄 윌슨 하원의원을 필두로 관세를 현저히 낮추는 법안이 준비되고 있었지만 메리랜드의 상원 의원 아서 고먼은 이 관세법안을 거의 완전히 수정하면서 관세는 거의 낮춰지지 않는 수준으로 수정이 되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이에 좌절을 하였지만 이미 민주당과 그로버 클리블랜드의 다음 대통령 선거에 대한 희망은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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