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A] – 미국 22대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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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 History

[USA] – 미국 22대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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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 미국 22대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Grover Cleveland


출생: 1837318
사망: 190864
정당: 민주당(Democrat)
재임기간: 1885 ~ 1889(이후 한 번 더 당선)
부통령: 토마스 A. 헨드릭스(Thomas A. Hendrix)
별명: 점보 삼촌(Uncle Jumbo) 덩치가 큰 것을 비유

 

● 헤이 마켓 스퀘어 시위와 미국 노동 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

 

맥코믹 하비스터 사에서 노동 조합들이 모여서 8시간 노동의 도입에 대해서 시위를 하던 도중, 경찰들의 사격으로 인해서 노동자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886 5 4일 시카고의 헤이마켓 스퀘어에서 이 총격 사건에 대해서 시위가 예정되었다.

하지만 이 헤이마켓 스퀘어 시위 도중 폭발물이 폭발을 하였고, 이로 인해 7명의 경찰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위 노동인권 운동가 8명이 체포가 되었는데, 이중 오직 한명만이 이 헤이마켓 스퀘어 시위에 참여를 하여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즈음 미국의 여러 자본가들이 높은 관세 등으로 인해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기업들이 소비자들에게 많은 갑질을 할 수 있었고, 자연스레 소비자들의 주류인 노동층들의 운동 또한 생겼다.

 

 

1886, 사무엘 곰퍼스(Samuel Gompers)는 미국 노동 연맹(AFL)을 창설하였다. 기존의 노동조합들의 경우 각 회사를 대표하거나 특정 직군들을 대표하는 노동 조합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사무에 곰퍼스의 미국 노동 연맹의 경우 이러한 노동 조합들의 연맹이라는 점에서 매우 큰 노동 조합 연맹으로서 당시 큰 의의가 있었다.

사무엘 곰퍼스는 AFL을 통하여 기업이나 정부 단위의 조직들에게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 큰 집단으로서 활동을 하고자 AFL(American Federation of Labor)을 창설하였다.

 

 

노동계는 무엇에 간절한가? 학교를 더 설립하고, 감옥을 덜 설립하고, 책을 더 많이 만들고 총을 덜 만들고, 더 배우고 고통을 줄이고, 욕심을 줄이고, 행복을 늘리고, 정의를 늘리고 복수를 적게 만들고, 우리는 단순히 더 나은 본성을 만들어갈 기회를 원할뿐이다.

-새뮤얼 곰퍼스(Samuel Gompers), 미국 노동장 연맹 창시자- 

 

 

● 그로버 클리브랜드식 반-포퓰리즘과 미국 남북전쟁 이후 첫 민주당 대통령 

미국 남북전쟁 이후 최초로 거의 사장되어버린 민주당(Democrat)출신의 첫번째 대통령이 그로버클리 브랜드이다. 그로버 클리브랜드는 당시 정계, 의회 등지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펼치던 정치인은 아니었다.

물론 그로버 클리브랜드는 뉴욕 주지사로서 높은 위치에는 있었으나 민주당 내부에서나 미국 정치계 내에서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 조차도 드물 정도로 적극적으로 정계에 욕심이 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로버 클리브랜드가 무려 미국 대통령으로서 당선이 되었지만 실제로 그의 정치적인 철학이나 정책 방향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로버 클리브랜드의 근본적인 정치철학은 ‘정부가 지지받는 것 그 자체를 위해서 시민들을 지원해주어서는 안 된다’이었다. 따라서 포퓰리즘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인 정치적 입장이었다.

그로버 클리브랜드는 단순히 지지율이나 시민들의 지지를 위해서 정부는 어떠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정치 철학을 가졌다.

 

 

그로버 클리브랜드의 이러한 정치철학은 1887년 텍사스에서 발생한 가뭄 사태에서 직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1887년 텍사스에서 가뭄이 심하게 든 관계로 정부 차원에서 농사를 짓기 위한 씨앗을 배급하기 위해 발의된 안건에 대해서 그로버 클리브랜드는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로버 클리브랜드는 단순히 ‘호의’를 얻기 위해서 정부가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단언하였고, 시민들이 정부가 무료로 제공하는 편의에 대해서는 오히려 의심하고, 경계를 해야 한다는 철학이 확고 하였다.

 

● 백악관 안에서 결혼한 첫번째 대통령 

그로버 클리브랜드는 대통령 선거 운동을 하던 당시 미혼이었고, 이를 공화당에서는 결혼을 해서 자기 가정을 꾸려본 책임감도 없고, 무능한 사람이라는 방식으로 폄하하기도 하였다.

 

 

1886 6 2, 그로버 클리브랜드는 프랜시스 폴섬(Frances Folsom, 21세의 나이로 미국 역대 제일 어린 영부인이다.)과 함께 백악관 안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5일간의 신혼휴가를 떠났지만, 백악관에서 일어난 결혼식이 끝난 이후에도 그 당일에는 백악관에서 집무를 보았다. 

 

 

● 주간 통상법(The Interstate Commerce Act) 

비록, 그로버 클리브랜드 자체가 반-포퓰리즘적인 성향이 매우 짙었지만, 이는 정부가 모든 일에 대해서 용인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호의를 위한 정책은 펼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비록 이러한 반-포퓰리즘적인 성향으로 인해서 많은 법안들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거부권을 해사하기도 하였지만, 법안을 제정하는 단계에서 개입하거나 자신의 개인적인 성향을 압력을 넣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로버 클리블내드는 주간 통상법(The Interstate Commerce Act)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지지를 하였고, 이는 미국의 첫 반기업 규제 기관의 창설과 정부 차원에서의 기업규제라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법안이었다.

 

 

주간 통상법은 주간 통상 위원회(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의 설치를 정당화하였고, 이 주간 통상 위원회는 기업들의 가격 조작이나 독과점을 감시하는 기관이 되었다.

이 당시 미국의 철도 회사들은 어떠한 개입 없이 화물 운송비부터 승객들의 탑승 비용의 조작 등을 할 수 있었다. 철도 회사들은 이를 이용하여 일종의 권력처럼 주 정부들을 압박까지 하는 수준까지 이르면서 주간 통상법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어 이 주간 통상법이 제정되었다.

이렇게 철도 회사들의 횡포로부터 출발한 주간 통상법과 주간 통상 위원회는 미국에서 최초로 의회 차원에서 마련된 정부 규제 기관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 도스 다양성법(Dawes Severality)과 제로니모의 항복

연방 정부 차원에서 많은 미국 원주민들을 억압하고, 이들의 영토를 빼앗는 작업이 진행되어 왔었다. 크레이지 호스(미친 말, Crazy Horse)과 같이 미국 연방 정부에 대항하는 최후의 족장들을 잡아들이고, 미국 원주민들을 ‘백인화’하는 정책들은 계속 실시되어 왔다.

하지만 이 시기 즈음 미국 원주민들의 인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또한 제기되었다. ‘불명예의 세기”(A Century of Dishonor’이라는 책을 집필한 헬렌 헌트 잭슨(Helen Hunt Jackson)을 중심으로 미국 연방정부의 잔악한 행동들을 비판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목소리들 또한 미국 원주민들의 다양성이나 문화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독립성을 보장하겠다는 목소리가 아니라 이들을 ‘백인화’시키는 것이 중심이 되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여론에 맞춰 도스법 또는 도스 다양성 법안(Daws Severalty Act)이 제정되었다.

도스법 또는 도스 다양성 법안은 미국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부족으로부터 독립하거나 단절하는 미국 원주민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고, 독립을 할 수 있도록 조금의 영토를 할양해주는 제도였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영토’나 ‘사유지’와 같은 개념은 미국 원주민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이라서 많은 이들이 이 제도를 악용하여 미국 원주민들의 이 작은 땅 또한 헐값에 매입을 하여 도스 법은 취지에 걸맞는 효과를 만들지는 못하였다.

전반적으로 도스법 또는 도스 다양성 법안은 취지부터 전체적인 결과까지 모든 것이 뒤틀렸다

 

 

제로니모(Geronimo)의 실제 이름은 Goyaałé로 그는 애리조나 주의 치리카와 아파치 (Chiricahua Apache) 족의 샤먼(영적인 지도자)였다.

많은 이들이 그를 전쟁 족장이라 생각하지만 그는 원래 영적인 지도자로서 자리 매김하였지만, 미국 연방정부에 대항하는 최후의 미국 원주민 족장으로서의 이미지가 굳어져 버렸다.

 

제로니모 Geronimo 

 

제로니모가 이끌던 미국 원주민들의 수는 매우 극소수였지만, 이 당시 미국 원주민들의 저항은 거의 소멸 된 상태였고, 언론에서는 제로니모를 소재로 매우 자극적으로 여론을 형성하면서, 마치 제로니모는 연방정부에 대한 극명한 위험요소로서 묘사 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는 현재까지도 미국 공수부대 내에서 제로니모의 용맹성을 존경하여 공수 강하시 제로니모를 외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886 9 4, 이미 이전에 두번이나 연방정부에 의해 체포되었던 제로니모는 연방 정부 넬슨 마일스 장군에게 최후의 항복을 선언하였다.

제로니모는 고향 애리조나로 송환 될 수 있다고 약속 받았지만 끝끝내 고향 땅 애리조나를 다시는 밟아보지도 못한다.

 

 

● 코카 콜라의 발명: 코카 콜라의 발명자 존 펨버튼 (John Pemberton) 

존 펨버튼(John Pemberton) 이라는 이름의 약사가 1886년 최초로 코카 콜라의 기원이 되는 음료수를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코카 잎 (우리가 아는 코카인의 원료가 맞다.)과 콜라 열매 추출물들을 바탕으로 만든 코카콜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존 펨버튼은 처음에는 약재로 코카 콜라를 만들었지만 결국 코카 콜라의 인기는 탄산 음료로서 좀 페버튼이 살던 미국 애틀랜타에서 더욱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코카콜라의 창시자 존 펨버튼

 

아사 G.캔들러라는 사업가가 이를 눈여겨 보고 존 펨버튼에게서 이 코카 콜라의 비법 및 판매 제조 권리를 사들였다.

아사 G.캔들러는 캘리포니아 등을 포함해 미국 동 서부 남부를 가리지 않고 미국 전역에 코카 콜라 제조 시설을 설립 한 뒤 코카 콜라 시럽을 제조하였다.

 

아사 G. 캔들러 : 코카콜라를 상업화 시킨 장본인 

 

이 코카 콜라 시럽을 탄산음료로서 제조 판매를 하기 시작하고, 이 코카 콜라는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였다. 아사 G 캔들러는 다시 코카 콜라의 제작/판매 권리를 1919년에 판매하였는데, 거의 1마내에 달하는 가격으로 다시 이 권리를 판매하였다.

존펨버튼은 2,300 $에 코카 콜라 판매 제조권리를 판 반면 아사 G.캔들러는 25,000,000 $에 코카 콜라의 판매제작 권리를 판매하였다.

 

 

●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관세

미국의 남북전쟁 전후로 미국의 수입 상품에 대한 관세는 매우 높게 매겨졌다. 남북전쟁이 실제로 발생하기 전부터 전운이 감돌고 있어서 연방정부 및 지역 정부 차원에서도 국내 산업들을 보호하고, 관세를 통한 수입은 전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이 높은 관세들은 철폐가 되지 않았고, 이는 국내 산업들을 보호하는데 일조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미국 내 산업들의 경쟁력 저하, 노동자에 대한 탄압 및 노조에 대한 탄압 (별다른 경쟁이 없으니 기업들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경쟁 없는 국내 기업들의 독점은 소비자들의 피해로도 이어졌다.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관세 인하를 시도하는 행위가 자신의 대통령 재신임 투표에 매우 큰 약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미국의 성장을 위해서는 너무 높은 관세 철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을 하였다.

하지만 이런 그로버 클리브랜드 대통령의 관세 인하 시도는 높은 관세로 인해 충당되고 있는 국고 수입을 포기 할 수가 없던 의회에 의해 결국 무마되었고, 그로버 클리브랜드 대통령의 재선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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