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jamin Harrison 벤자민 해리슨 |
출생: 1833년 8월 20일 |
사망: 1901년 3월 13일 | |
정당: 공화당 Republican | |
재임기간 : 1889년 ~ 1893년 | |
부통령: 리바이 P. 모턴(Levi P. Morton) | |
별명: Little Ben 작은 벤 |
● 셔먼 반독점법 / 셔먼 반-트러스트 법안 The Sherman Anti-Trust Act
강도 귀족들이라고도 멸칭을 부르며, 도금의 시대(길디드 에이지 Gilded Age)라고 불리며 많은 미국 기업들이 지난 20여년간 성장을 해왔다. 많은 미국 기업들이 자신들의 산업 분야에서 독과점을 유지하며, 더더욱 성장세를 이어 갈 수 있었다.
록펠러 재단의 시초가 되는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의 경우에는 스탠다드 오일 트러스트(Standard Oil trust)라는 ‘트러스트’ 즉, 같은 산업이나 동일한 생산단계에 있는 회사들을 하나의 거대한 자본에 결합 하는 일종의 기업합병 단체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록펠러 그룹은 이러한 트러스트를 바탕으로 석유 산업계의 주도권을 어떠한 위협 없이 쥘 수 있었다. 벤자민 해리슨은 대통령 취임연설(Inauguration)에서 자유 시장과 경쟁을 위해 이러한 반-트러스트 및 반 독점 법안들을 상정할 것을 역설 할 만큼 어느 정도의 기업 규제와 시장 혁신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
1890년, 오하이오의 상원의원 존 셔먼의 주도 아래 셔먼 반 독점법 즉, 셔먼 반-트러스트 법안이 미국 의회에 의해 통과되었다.
셔먼 반 독점법은 주간 상거래 및 시장경쟁을 제한하는 합의들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고, 이러한 정의에 준하지 않는 경쟁 없는 합의들에 대한 제제안을 명시하였으며, 특정 기업이 산업의 독점을 할 수 없도록 명시하였다.
● 1차 범미주 회의(Pan-American Conference)와 라틴 아메리카와 태평양으로의 확장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의 행정부는 태평양 일대, 중앙 아메리카 및 남 아메리카를 포함한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높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군 증강계획 및 조선업을 장려하였다.
벤자민 해리슨은 파나마 지협에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초기 노력 또한 쏟기 시작하였다.
훗날 이 파나마 지협에 건설될 파나마 운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이어주며, 미국과 전세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기반 시설이 된다. 제임스 G.블레인(James G. Blaine)국무부 장관은 첫 범 미주 회의의 의장으로서 1889년부터 1890년까지 범미주 회의를 주도하였다.
해리슨 행정부는 이 회의를 통해 서쪽 반구(웨스턴 헤미스피어,Western Hemisphere) 또는 범 미국 주의(판 아메리카니즘, 범 아메리카니즘 Pan-Americanism)을 강조하여 북중남 미국 대륙 국가들의 결속을 주장하였다.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의 임기 중에는 설탕 산업 종사자들이 하와이 원주민 정부들과 충돌이 일어나면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 군인들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미국의 설탕 산업 종사자들은 이 충돌 도중에 하와이 원주민 통치 정부에 반기를 들어 이들을 거의 제압하는 수준까지 이르렀고, 훗날 하와이의 미국 편입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도 시작하였다.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의 임기 중에는 하와이의 미국 편입이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벤자민 해리슨 행정부 시기 동안 태평양과 타 미국 대륙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었다.
●엘리스 아일랜드 Ellis Island
1800년대 후반 들어서는 중부 유럽과 남부 유럽 출신의 이민자들이 미국의 뉴욕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민자들이 워낙 많은 나머지 이민국에서 이들의 서류작업을 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이민자들의 임시 거처와 추가적인 행정작업 시설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892년 1월 1일, 저 너머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엘리스 아일랜드에 미국 입국 심사대 및 행정 작업 처리 시설과 이주민들을 위한 임시 거주지가 마련되었다.
엘리스 아일랜드에는 특히나 많은 유태인들과 이탈리아인 출신 이민자들에게 미국에서의 첫 보금자리가 되어 주는 역사적인 의의가 있었다.
● 캐리 A. 네이션 Carry A. Nation - 도끼 든 마녀
이 시점을 전후로 여성과 아동 인권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증대되고 있었다 1890년대 들어서서 대두된 사회문제 중 하나가 바로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문제들이었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가정에서 행패를 부림으로 인해 아동과 여성 학대로 이어졌고 이는 많은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기독교 사회와 여성인권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금주 운동이 아닌 알코올 퇴치 운동(절제 운동, Temperance Movement )이 부흥하였다. 이러한 여성 인권 운동가들 중에서는 캐리 A. 네이션(Carry A.Nation)은 독보적인 행보를 보였다.
캐리 A.네이션은 도끼 든 마녀라는 별명을 가지고, 알코올을 판매하는 살롱들을 직접 도끼를 들고 부수는 등의 과격함으로 미국에서 유명해졌다. 이러한 운동들은 훗날 금주법제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 1890년 군인 지원 및 군인 장애 연금 개혁 (의역, Dependent and Disability Pensions Act of 1890)
벤자민 해리슨은 미국 북군에서 장성의 계급으로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하였으며, 남북 전쟁이후 수많은 참전 용사들의 비극에 대해서 항상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던 대통령이었다.
벤자민 해리슨은 전쟁이 물리적인 상처와 죽음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아물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힌다는 점도 백분 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에서는 전투로 인한 부상자들에게만 어느 정도의 보상금을 지급해주고 있었기에 벤자민 해리슨은 군인 연금개혁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1890년 군인 지원 및 군인 장애연금 개혁(The Dependent and Disability Pensions Act of 1890)은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가족들, 부상으로 인해 정상적인 수입 활동이 불가한 참전 용사들, 그리고 전투로 인한 부상이나 사망여부와 관계없이 남북 전쟁 참전 용사들에게 소정의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개혁이 되었다.
● 셔먼 은 구매법(Sherman Silver Purchase Act)
1800년대 후반 미국 전역에서 계속적으로 은광이 발견되면서 은광 개발이 이어졌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은광들이 발견되고 개발된 나머지 은의 수요를 뛰어넘을 정도로 은의 공급이 많아졌고 이는 은의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다.
은광 개발 회사와 관련 업체들은 자금을 이용하여 정부에 로비하여 은본위제와 비슷한 개념으로 은과 화폐의 교환이 이루어지도록 부단히 노력하여 은의 가격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미국 남부와 서부의 일반 농민들이나 개척자 출신 일반인들도 이를 지지하였는데, 은의 유입은 자연스레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면서 기존에 이들이 진 빚의 가치도 낮추기 때문이었다 당시 해리슨의 행정부는 맥킨리 관세 법안의 통과에 집중하고 있었고 이러한 은의 공급을 온전히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란 것을 알았기에 정치적 협의를 보기로 한다.
해리슨 행정부는 동부 출신의 자본가들을 만족시키고(맥킨리 관세로 덕볼 미국 기업가들을 생각하면 이해 가능하다) 맥킨리 관세법안을 통과하기 위한 서부와 남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정치적 협의 및 절충안으로서 셔먼 은 구매법을 제안하고 통과시킨다.
셔먼 은 구매법으로 인해 미국 정부는 의무적으로 450만 온스(ounce)의 은을 매달 구매해야 했는데 이는 사실 약 127톤이나 되는 은을 미국 연방정부가 매달 구매해야 함을 시사하였기에 훗날 큰 문제를 야기한다.
● 맥킨리 관세 The McKinley Tariff
관세 장벽과 관세율을 낮추고자 시도를 하다가 대통령 재선에 실패한 전직 대통령 그로버 클리브랜드(24대 대통령으로 재선되는데 성공한다)과 달리 벤자민 해리슨은 관세율을 높여서 대통령 재선 기회를 버려버린 대통령이 되었다.
벤자민 해리슨과 그의 행정부는 훗날 미국의 25대 대통령이 될 윌리엄 맥킨리 (William McKinley)가 발의한 일명 맥킨리 관세(The McKinley Tariff) 은 미국 역대 가장 높은 관세율인 48%까지 관세를 올리는 법안이었다. 맥킨리 관세는 셔먼 은 구매법과 비스한 시기에 통과가 되었다.
하지만 두가지 법안 모두 정치적인 합의로 인해 조율이 된 법안이다 보니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맥킨리 관세 법안이 통과되자마자 미국 국내 기업들은 역대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관세율 덕분에 외국 기업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고 이를 믿고 마음껏 가격 인상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일반 대중여론은 이로 인해 맥킨리 관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고, 이는 곧바로 공화당과 맥킨리 행정부의 지지율의 곤두박질로 이어졌다.
'International &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USA] - 25th President of the USA William McKinley (0) | 2024.04.01 |
---|---|
[USA] – 미국 24대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 재선 (0) | 2023.07.19 |
[USA] - 24th President of the USA Grover Cleveland - re-elected (0) | 2023.07.17 |
[USA] – 미국 22대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0) | 2023.07.16 |
[USA] – 23rd President of the USA Benjamin Harrison` (0) | 2023.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