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ew Jackson |
출생: 1767년 3월 15일 |
사망: 1845년 6월 8일 | |
정담: 민주당(Democrat) *아직 현 시점의 민주당은 아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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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1829년 ~ 1837년 | |
부통령: 존 C. 칼훈(John C. Calhoun), 마틴 반 뷰랜(Martin Van Buren) | |
별명: 올드맨 히코리(의역: 고집 센 양반) Old Man Hickory |
● 엽관주의(Spoils System) 와 잭소니언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 feat. 정당주의의 본격화
앤드류 잭슨의 집안은 본래부터 명문 집안은도 아니었을 뿐 더러 미국 독립전쟁, 질병 등 갖은 이유로 인하여 가족을 잃은 고아였다. 하지만 그는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독학을 통해 법을 공부하고 후에는 군에도 입대하여 플로리다 침공 등 갖은 공적을 쌓은 인재였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앤드류 잭슨은 최초로 ‘일반인’ 또는 ‘평민’ 층에서 자수성가한 대통령이었다. 앤드류 잭슨은 자신의 배경으로 인하여 다수결로부터 오는 힘과 일반 민중들이 가진 잠재력에 큰 가능성이 있다고 믿은 대통령이었다 앤드류 잭슨은 엘리트주의보다는 일반 민중에 대한 민주주의를 믿었고, 이는 ‘잭소니언 민주주의’로도 불린다.(Jacksonian Democracy)
앤드류 잭슨은 또한 공직 임용에 있어서 실무능력 이외에도 정치적인 지지, 혈연, 지연 학연 등도 참고하는 엽관주의(Spoils System)(정실주의,Patronage System으로도 불린다.) 또한 적극적으로 도입한 대통령이었다. 앤드류 잭슨은 이러한 엽관주의를 적극 활용하여 연방정부의 주요 관직에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들을 대거 기용하였다.
또한 그는 투표권을(물론 시대적 한계로 백인 남성에 대해 한정적이었다.) 적극적으로 ‘일반’ 대중들에게도 부여하여, 민중들의 정치참여도를 높였다. 잭슨은 ‘다수결의 원칙’(majority rule)을 중시하고 일반 민중 또한 정치적 결단을 내릴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와 같이 투표권의 범위를 넓혔다.
앤드류 잭슨은 민주주의의 가장 어두운 면과 가장 밝은 면을 모두 보여준 대통령 중 한 명이었다.
제퍼소니언 민주주의의 특징 : 약한 정부, 의회와 분리된 행정부, '자연적인 서열 중시'와 엘리트주의, 자영농 중심, 소형 농업 공화국, 정부요직의 수행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
잭소니언 민주주의의 특징 : 약한 정부를 갖추되 강한 행정부의 필요성, 일반 평민들의 정치적 참여 유도, 정치적 참여 유도를 위해 여러 요소를 고려하여 관직에 임명하는 엽관주의 지향, 노동-공업-농업 등 일반 평민 중심적, 정부 요직의 수행을 위해 교육이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
● 페기 이튼 불륜 의혹(Peggy Eaton Affair)
내각 관료 사이의 정치가 중요한 만큼, 내각 관료들의 정부인들 사이의 정치 또한 중요하였다. 존 이튼(John Eaton)의 부인 페기 이튼(Peggy Eaton)은 내각 관료들의 부인들 사이에서 배척을 당하는 등 소위 ‘왕따’를 당하였다.
존 이튼이 페기 이튼을 결혼 하기 이전, 페기 이튼은 자신의 전남편 존 팀 버레이크(John Timberlake)과 결혼을 하였다(전남편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일부 문제는 될 수 있었으나 주요 문제는 아니었다).
존 이튼은 사실 존 팀버레이크와 페기의 하숙/기숙 사에 거주를 하고 있었고, 존 팀버레이크는 해군에서 복무를 하는 장교였는데, 존 팀버레이크가 임무 중 사망을 하고 말았다.
존 팀버레이크가 사망을 하기 이전에 페기와 존 이튼 사이의 불륜이 의심 되었고, 당시 여성들에 대한 엄격한 도덕적 규율이 있었던 만큼 존 이튼과 페기 이튼에 대한 안 좋은 시선이 팽배하였다.
존 이튼은 앤드류 잭슨의 전쟁부 장관이었으며, 앤드류 잭슨은 이러한 백악관 내 존 이튼과 페기 이튼에 대한 안 좋은 시선들에 대하여 존 이튼의 편을 들어주었다.
앤드류 잭슨은 자신의 내각 구성원들 사이의 이러한 냉랭한 분위기를 해소하고자 갖가지 친목회를 여는 등 노력을 하였으나, 이 시기 즈음 다수의 내각 관료들이 사임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임을 한 내각 중에는 앤드류 잭슨과 절친 하였지만 정치적 입장으로 대립을 하게 된 부통령 존 칼훈(John C. Calhoun) 또한 포함 되어 있었다. 여러 복잡한 정치적 사항이 있었지만 페기 이튼과의 교류도 완강히 거부를 한 존 칼훈을 포함하여 사임한 내각 관료들에 대해 앤드류 잭슨은 매우 크게 실망하였다.
이렇게 사임한 존 칼훈을 대신하고 페기 이튼과도 적극적으로 교류를 할 의향이 있던 마틴 반 뷰렌(Martin Van Buren)은 부통령 자리에도 오르고 훗날 미국의 8대 대통령으로도 선출된다.
● 키친 캐비닛(Kitchen Cabinet) / 비공식 자문위원, 주방 내각
페기 이튼 불륜 의혹으로 인한 내각 관료들의 대량 사퇴 등 사건으로 인하여 앤드류 잭슨은 내각 관료 회의 자체에 참석 하는 것이 꺼려졌다. 앤드류 잭슨은 내각 관료 회의 숫자를 줄이고, 대신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들과 함께 백악관의 주방에서 잦은 만남을 가졌다. 이러한 주방에서의 내각(직역하면주방 내각, Kitchen Cabinet) 즉, 키친 캐니닛은 현재는 비공식 자문위원을 일컫는 정치 용어가 되었다
● 미국 연방법 무효화 위기(Nullification Controversy)
미국에서 증오의 관세(Tariff of Abominations)정책을 옹호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앤드류 잭슨 대통령과 존 칼훈 부통령 모두 증오의 관세에 대해 반대를 하였지만, 반대를 하는 관점의 차이가 있었고, 이는 훗날 미국 연방법 무효화 위기(Nullification Controversy)로도 이어진다.
존 칼훈은 제퍼소니언 민주주의(Jeffersonian Democracy)를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제퍼소니언 민주주의는 ‘연방 주들의 권리’와 엘리트주의와 개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사상인 반면 앤드류 잭슨의 잭소니언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는 일반 민중의 권리의 보장과 연방 정부에 제약을 두되 행정부의 권력은 강하게 둘 것을 주장하는 민주주의였다.
존 칼훈은 자신의 고장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가 증오의 관세에 의해 매우 고통 받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는데, 그는 주 정정부들이 연방정부의 법을 ‘무효화’(nullify)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앤드류 잭슨의 입장에 대해서는 많은 대중들의 관심이 있었는데, 잭슨은 주 정부가 연방정부의 법을 무효화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존 칼훈은 이러한 근본적인 정치적 차이, 페기 이튼의 불륜 의혹 등 다양한 문제로 앤드류 잭슨과 갈등이 발생하였고 1932년 부통령직에서 사임을 하였다.
1930년부터 이러한 ‘주 정부의 연방법 무효화’에 대한 논란이 이미 일고 있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증오의 관세에 맞서서 연방법을 무효화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이뤄졌다.
로버트 헤이니(Robert Y. Hayne)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의원으로 그는 주 정부의 권한을 내세우며 증오의 관세의 무효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증오의 관세 자체가 악법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연방정부의 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메사추세스 주의 의원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은 이러한 로버트 헤이니의 주장에 맞서 연방 정부에서 제정한 법안을 무효화 할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대법원에게만 있다고 반박하였다.
1932년, 의회에서 1928년에 제정된 증오의 관세법의 세율을 완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는 1928년과 1932년 제정된 세법을 모두 무효화 하겠다고 발표 하였다.
자칫 하면 미국 연방정부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었기에 앤드류 잭슨은 연방군을 사우스 캐롤라이나 국경으로의 배치를 명령하는 한편, 헨리 클레이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와의 타협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여러 압박에 결국 굴복하여 미국 연방법 무효화 위기(Nullification Controversy)는 마무리가 되었다.
● 미국 제 2 연방은행의 청산의 시작 / 은행 전쟁(Bank War)
미국 제 2 연방은행은 인가 만료 예정이 1936년이었기에, 의회로부터의 재인가 승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미 일찍이 제 2 미국 연방 은행은 앤드류 잭슨의 반대파에 많은 재정적 지원을 하여 그의 당선을 막고자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앤드류 잭슨은 제 2 미국 연방 은행의 설립의의와 금융정책에 대한 극렬한 반대파였다.
그는 은행전쟁(Bank War)을 선포하고, 1836년에 이르기도 전에 미국 제 2연방은행의 기능을 정지시키고자 하였다. 앤드류 잭슨은 미국 2 연방 은행이 강한 정부를 추구한 알렉산더 해밀턴과 연방주의 정당의 잔해라고 생각 하였고, 2 연방 은행의 금융 정책이 도리어 미국의 서부 개척을 위한 투자를 막고 있었다고 생각하였다.
앤드류 잭슨은 여러 인물을 갈아 치운 끝에 로저 태니(Roger B Taney) 에게 미국 2 연방 은행에 예치된 연방정부의 예금을 인출하도록 하였다. 이에 맞서 미국 2연방 은행 의장 니콜라스 비들(Nicholas Biddle)은 이에 맞서 예금율을 올리면서 채권과 대출금을 회수하기 시작하였다.(어느 정도 채권과 대출금 회수는 재인가가 승인 되지 않은 시점에서 당연한 것이긴 하였다.)
하지만 결국 미국 2 연방은행은 의회의 재 승인을 받지 못하여서 연방 은행이 아닌 민간 은행으로 전락하고 이후에 결국 청산되고 말았다. 이때 연방정부의 예치금은 주 단위로 은행에 재예치가 되면서 서부 개척에 대한 개발 등 투자가 활성화 되기는 하였다.
● 주화 유통법(The Specie Circulator)
Specie는 ‘금’과 ‘은’으로 만든 주화를 의미한다. 1836년 7월, 앤드류 잭슨은 새롭게 주화 유통법(Specie Circular’)을 제정한다.
스피시(Specie)는 주로 희귀 금속으로 만든 ‘금속 통화’를 의미하는데, 이 당시 많은 연방토지의 구매는 이러한 스피시(Specie)와 같은 주화가 아닌 종이 화폐로 거래가 많이 되었기에 앤드류 잭슨은 종이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크게 우려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금본위제와 같은 제도(금의 양에 맞춰서 화폐가 찍히는 정책)이 적용되고 있었다.
앤드류 잭슨은 연방 토지의 거래에 대해서는 무조건 Specie 주화로만 거래가 되도록 주화 유통법을 제정하였다.
미국 2 연방 은행의 기능이 정지되고 민간 기업으로 전락을 한 시점이었고, 여기에 예치된 연방 정부의 예치금은 활발하게 유통이 되었기에 앤드류 잭슨이 주화 유통법을 제정하였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수많은 기업과 가정들이 화폐 순환이 안되어 부도가 되었고, 토지의 가치 하락으로 인한 재정적인 타격 또한 매우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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