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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 History

[USA] - 미국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 - 파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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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Monroe(제임스 먼로)

출생: 1758 4 28
사망: 1831 7 4 4 July 1831
정당: Democratic-Republican(민주공화당)
재임기간: 1817년부터 1825
부통령: Daniel D. Tompkins(다니엘 D 톰킨스)
별명: 최후의 Cocked Hat(트리코르느로도 불리는 삼각형의 모자) 최후의 미국 독립전쟁 참전 미국 대통령

 

McCulloch vs Maryland 맥컬록 vs 메릴랜드 건

1791, 조지 워싱턴이 연방은행의 창설을 위한 법안을 승인 하면서 첫번째 미국 연방 준비은행(The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이 설립 되었다.

조지 워싱턴이 연방준비은행을 설립한 배경에는 알렉산더 해밀턴과 같은 이들이 중앙정부 차원에서 국가의 경제와 정부 재무상태를 조종할 수 있는 기관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기 때문이다.

 

 

1812년 전쟁으로 인하여 미국 정부가 대영제국과 전쟁을 벌인 이후, 재무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존 제이콥 아스토르와 같은 재무가들은 새로운 연방 은행의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816년에는 미국의 두번째 연방은행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메릴랜드 주 정부는 벌티모어에 위치한 미국 제 2연방은행 지점에게 세금을 부과하면서 갈등이 발생하였다.

 

미국 연방 은행을 설립한 이유는 연방정부의 권한으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미국 제 2연방은행의 은행원인 제임스 맥컬록(James McCulloch)는 이러한 메릴랜드 주 정부의 세금 부과를 거부하였고, 메릴랜드 주정부는 제임스 맥컬록을 고소하였다.

맥컬록 대 메릴랜드 건은 결국 대법원 판결까지 가게 되었다. 대법관 존 마샬(John Marhsall)은 연방정부의 권한(이는 알렉산더 해밀턴이 주장하던 ‘Implied Power’, 묵시적 권한의 일부를 인정한 셈이다.),

메릴랜드 주정부가 미국 제 2연방은행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행위는 부당하다고 판결을 하였다. 존 마셜은 해당 판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The subject is the execution of those great powers on which the welfare of a nation essentially depends,” “It must have been the intention of those who gave these powers, to insure, as far as human prudence could insure, their beneficial execution.”[1]

“해당 사건의 주제는 한 국가의 복지의 유지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본질적으로 필요한 국가의 권한의 수행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의 범주내에서 국가에 이러한 권한을 부여한 본질은 국가가 유익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함이 틀림없다. “

(의역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The American System and the Cumberland Road(미국 시스템과 컴벌랜드 도로)

미국의 국토가 넓어지면서, 그에 따른 기반시설들의 마련 또한 매우 중요 해졌다. 기반 시설의 마련이 중앙 연방정부의 역할인지 지방정부의 역할인지에 대한 갈등은 존재하였지만 미국 전체적으로 기반 시설들에 대한 수요는 크게 늘고 있었다.

헨리 클레이(Henry Clay)과 존 칼훈(John Calhoun)은 통칭 아메리칸 시스템(미국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도로와 운하의 건설을 통한 교통기반시설들의 건설 필요성을 피력하였다.

헨리 클레이는 미국 시스템의 도입의 재정을 지원하고 자국 생산품들의 적극적인 소비를 위한 관세 또한 미국 시스템의 일환으로서 제안을 하였다.

 

Henry Clay헨리 클레이의 미국 시스템 제안

 

이로 인해 미국 시스템은 대표적인 미국의 중상주의 정책이 되었다. 제임스 먼로는 이러한 교통 기반시설의 건설이 연방정부의 권력 남용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지만 미국 시스템을 승인하였다.

하지만 제임스 먼로는 컴벌랜드 도로의 연장에 대해서는 최초로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제임스 먼로는 이전부터 미주리 타협이나 미국 시스템과 같은 사안들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까 망설였으면서도 결국 행사하지 않았지만, 컴벌랜드 도로 연장만큼은 거부권을 초기에 행사하였다.

하지만 제임스 먼로는 컴벌랜드 도로 연장안에 설득되어 1825년에 승인을 하였다.

 

컴벌랜드 도로

 

컴벌랜드 도로는 연방 정부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국가도로’, ‘국도’(National Road) ‘내셔널 로드라는 이명을 가졌다.

추후에는 주립 정부에 유지 보수 비용을 넘기기도 하였지만 컴벌랜드 도로는 메릴랜드 컴벌랜드부터 일리노이 반달리아(Cumberland Maryland에서 Vandalia Illinois)까지 이어주면서 수많은 서부로 향하는 개척자, 이주민들과 상인들이 편리하게 교통을 이용할 수 있던 도로가 되었다.

 

 

The Missouri Compromise(미주리 타협)

1819년도에, 미주리 주의 주민들이 미국 의회에 미주리를 ’(state) 로 인정해달라는 법안을 제출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노예를 인정하는 주가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는 주보다 많아지는 문제로 인하여 의회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미국 연방정부는 이미 노예무역 금지안을 제정한지 오래 되었지만, 노예 제도가 미국 남부의 경제에 차지하는 부분이 워낙 크다 보니 노예 무역 금지안에 한계가 명확하였다.

로 미국 북부에 위치한 자유주들은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이 나라 전체적으로 확장이 되는 것을 막고 싶었지만 미주리 주의 경제 또한 노예제에 많이 의존하였기에 연방 정부는 고민이 많았다.

 

 

미주리 가입 이전 22개의 주가 미국에 존재를 하였는데, 다행히도 메인(Maine) 주 또한 로 인정해달라는 법안을 제출하여서 노예주 ‘12와 자유주 ‘12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기에 노예 주의 수가 자유 주 수보다 많아지는 문제는 발생하지 않아서 주정부의 걱정은 덜해졌다.

하지만 제임스 먼로는 끝까지 노예주의 추가 승인에 대해서 망설였다. 하지만 남부의 노예주들은 미주리 주의 승인에 있어서 노예주들이 루이지애나 위도 36° 30′ 북쪽으로는 노예제도를 금지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안하면서, 제임스 먼로를 설득하였다.

 

 

제임스 먼로는 미주리 주를 승인하지 않으면, 미국 내전(추후에 결국 미국 시빌 워, 미국 남북전쟁, 미국 내전이 결국 발생하였지만)이 발발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마지 못해 남부 노예주들의 타협안에 승락을 하였다.

182036, 제임스 먼로가 미주리 타협안에 서명을 하면서 미주리 주와 메인 주의 편입과 함께 루이지애나 36° 30′이북의 노예제도 금지안에 대해 승인하였다.

 

 

The Mason and Dixon Line & Slavery in the New States(메이슨 딕슨 선과 미국의 노예제도)

 메이슨 딕슨 선은 사실 대영제국의 1700년대 미국 식민지 지배 시절의 잔재이다. 찰스 메이슨(Charles Mason)과 제레마이아 딕슨(Jeremiah Dixon)은 영국 왕실의 명령으로 인하여 펜실베니아와 메릴랜드의 경계선을 긋기 위한 작업을 실시하였다.

찰스 메이슨과 제레마이아 딕슨이 선정한 경계선은 위도로 39° 43′ 이었으며, 영국 왕은 이를 펜실베니아와 메릴랜드를 구분 짓는 주경계선으로 선포를 하였다.

 

 

하지만 찰스 메이슨과 제레마이아 딕슨이 구분 지은 메이슨 딕슨 선은 이후 미국 남북전쟁에서 자유주와 노예주들을 구분하는 상징이 되어버렸다.

 

 

이 메이슨 딕슨 선을 경계로 이북의 주들은 이미 공업과 제조업을 중심으로 값싼 원료와 타국 공산품에 대한 관세규제를 요구하는 정치경제적 성향이 생긴 반면 메이슨 딕슨 선 이남의 주들은 목화재배를 포함한 농업과 노예 자체들의 가치를 중심으로 값비싼 원료와 관세가 없는 공산품(자신들은 공산품을 생산하지 않기에 이를 싸게 소비할 수 있다.)를 추구하는 정치 경제적인 성향이 생겼다.

 

 

Regionalism(지역주의의 심화)

1821년 이후 미국 연방정부에는 총 24개의 주가 존재하였다. 미주리 타협 이후에도 노예주의 숫자와 자유주들의 숫자는 서로 각각 12개씩 1:1 균형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메이슨 딕슨 선 이북과 이남의 정치 경제적인 견해차이가 극명하게 갈리기 시작하였다. 메이슨 딕슨 선 이북의 주들은 이미 뉴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공장화와 제조업이 경제의 주축이 된 반면 남부 주들은 아직도 목화 생산과 노예들 자체가 가진 경제적인 가치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또한 미국 이북의 주들은 노예 제도를 멸시한 반면 남부 주에서는 노예제도는 자신들의 농업과 상품작물 재배에 대한 노동력으로서 필수였을 뿐만 아니라 노예들 자체가 가지는 경제적인 가치가 미국 남부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남북간의 정치 경제적인 갈등이 심화 되고 지역주의가 심화되었다.

미주리 주의 편입부터 시작하여 남부와 북부의 주들은 연방정부 내에서의 정치적인 견해에 대해서 이러한 정치 경제적인 입장차를 서로 의식하고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The Monroe Doctrine(먼로 독트린, 먼로 정책)

 

 

제임스 먼로는 수 많은 성공적인 외교 협상과 정책을 이끈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의 조언을 받아들여, 유럽의 강대국들에 대한 미국의 입지를 선포하는 계기로서 1823122, 미국 의회에서 먼로 독트린으로 대변되는 연설을 발표한다.

이 당시에 확립된 먼로 독트린의 개념은 미국의 쿠바 미사일 사태를 비롯한 현재까지도 미국의 대외정책의 밑바탕이 되는 등 큰 영향력을 현재까지도 펼치고 있다.

먼로 독트린은 미국 정부가 한 국가로서 국가 내부의 내실을 다졌고, 해외에서도 자국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을 만큼 국가체계가 안정화되었고, 유럽 국가 들에도 대항을 할 수 있는 만큼 국력을 쌓았다는 점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제임스 먼로는 이 연설을 통하여 (1)미국은 유럽 열강들의 내부 정치상황에 관여하지 않는다. (2) 미국은 이미 서부 반구에 존재하는 유럽의 식민지들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권한을 인정한다. (3)하지만 현 시점부터 미국은 서부 반구에 더 이상의 추가적인 식민지 개척 활동들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추가적인 식민지 개척 활동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응 할 것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였다.  

 

 



[1] McCulloch v. Maryland - Summary, Decision & Significance - History. https://www.history.com/topics/united-states-constitution/mcculloch-v-mary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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