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A] - 미국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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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 History

[USA] - 미국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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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Quincy Adams(존 퀸시 애덤스)

출생: 1767 7 11
사망: 1848 2 23
정당: Democratic-Republican(민주-공화당)
재임기간: 1825 ~ 1829
부통령: John C. Calhoun(존 칼훈)
별명: Old Man Eloquent(능숙하고 지혜로운 노인)

 

아메리칸 시스템(American System)의 확장 시도

 '작은 정부' 추구하고 정부의 과도한 힘을 경계하는 민주 공화당의 정치적인 입장과 달리 존 퀸시 애덤스는 상원의원 시절부터 정부 주도의 기반 개발 계획인 아메리칸 시스템을 지지하였다.

존 퀸시 애덤스는 공공 기반 시설에 대한 연방정부의 지원이나 관세의 설정이 반헌법적인 행위나 정부의 권력남용이라고 생각 하지 않았다.

애덤스는 관세의 설정으로 뉴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성장중인 제조업을 보호하고 교통 기반 시설의 개방을 통해 남부에서 생산하는 작물 및 원료의 물류 운송을 도울 수 있기 때문에 미국 남북 전역으로 아메리칸 시스템의 도입이 이로울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던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되고, 자신의 정당과도 정치적으로 일관되지 못해서 대내외적으로 정치적 적이 많은 상황이었다.

 

컴벌랜드 도로(국도로도 불린다. National Road)와 체사피크 만과 오하이오 강의 운하

 

존 퀸시 애덤스는 결국 자신의 정책들을 제대로 펼 수 없는 상황에 처했고, 아메리칸 시스템의 확장을 위해 컴벌랜드 도로(Cumberland Road, 국도 즉, National Road로도 불린다)의 오하이오까지의 연장과 체사피크만(Chesapeake Bay)와 오하이오 강의 운하 건설의 2개건만 승인 받을 수 있었다.

 

Henry Clay, 아메리칸 시스템을 제안한 헨리 클레이

 

Panama Congress (파나마 회의)

중부 아메리카와 남부 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1800년대 초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정부와 국가들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나라 중에는 콜롬비아와 멕시코 또한 있었다.

1826년 콜롬비아의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는 멕시코와 미국 정부에 파나마에서 평화와 스페인 정부에 대한 범 아메리카 적인 외교 정책의 일치 등 사안들에 대해서 논의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런 신생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평화적인 의도의 제안에 당시 국무부 장관 헨리 클레이(Henry Clay)와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은 적극적이었으나 의회의 강한 반대로 미국의 파나마 회의 참석은 무산되었다.

 

 

사실 라틴 아메리카의 공화국들 또한 대다수가 노예제도의 반대를 법제화하였기 때문에 이들과 국경이 가까운 미국 남부의 대표 상원 의원들은 이들과의 정치적인 협력을 두려워하였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마저 추후 노예 제도 폐지에 대한 압력을 넣으면 이미 얼추 맞건 노예 주와 자유주들의 균형이 깨질 것을 염려한 셈이다.

파나마 회의 참석 무산과 더불어 존 퀸시 애덤스는 갖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재임기간 중에 국정 운영에 방해를 받았다.

시몬 볼리바르 (Simón Bolívar)와 그의 파나마 협정 참가 제안서

 

미국 최초의 증기기차 선 볼티모어-오하이오 선 B&O Line

 

B & O 선의 최종 건설

 

1828 7 4, 미국의 독립 기념일에 맞춰 볼티모어 주는 최초의 증기 기차선로 건설을 시작하였다.

볼티모어-오하이오 선로 회사의 주도로 볼티모어에서 메릴랜드의 엘리코트 밀 (Ellicott’s Mill)까지 13마일 길이의 이 철로는 2년애에 완공이 목표였다.

이 날의 행사에는 당시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후의 생존자인 찰스 캐롤(Charles Carroll)이 참가하여 볼티모어-오하이오 선로의 건설의 시작을 선포해면서 독립 기념일에 공사를 시작하는 취지에 의의를 더했다.

추후 해당 선로는 공사를 시작한 회사의 이름에 걸맞게 볼티모어에서 오하이오까지 연결하게 된다.

 

 

사진을 찍은 최초의 대통령

루이 다게르(Louis Daguerre)는 최초로 사진을 찍은 형상이 보존 되는 카메라를 개발하였다. 이전의 사진기들은 형상을 찍는데 성공하였으나 형상을 사진 형태로 보존하지는 못하였다.

이 카메라와 카메라 장식은 다게르의 이름을 따서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이러고 불렸다.

이 사진기는 1840년대에 개발되어서 비록 존 퀸시 애덤스의 재임기간 동안의 사진을 남기지는 못하였지만, 퇴임 후 다게레오타입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 사진이 찍힌 최초의 미국 대통령은 존 퀸시 애덤스가 되었다.

 

존 퀸시 애덤스의 사진

 

증오의 관세(Tariff of Abominations) 과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의 분화와 탄생

아메리칸 시스템 정책을 부흥하기 위해서 존 퀸시 애덤스는 수입되는 공산품들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의회 내에서 그와 대적하는 연방주의정당(Federalist)를 비롯하여 민주 공화당 내부의 적들은 줄곧 존 퀸시 애덤스의 발목을 잡아왔다.

민주 공화당 내에서 일명 잭소니언’(Jacksonian)이라고 불리며 앤드류 잭슨를 극렬히 지지하는 민주 공화당원들은 존 퀸시 애덤스에 대항하여 법안이 실패하도록 수입되어 오는 원료에 대해서도 관세가 부과되도록 법안을 수정하였다.

 

증오의 관세 / Tariff of Abomination

 

잭소니언(이들은 추후 민주당, Democrats로 분화를 하는 주요 세력이 된다.)들은 당연히 수입되어 오는 원료들을 사용하여 공산품을 생산하는 뉴 잉글랜드의 상원 의원들과 권력자들 그리고 연방주의 정당원들이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훗날 증오의 관세’, ‘어보미네이션 관세’(Tariff of Abominations)로 불리는 이 관세법은 의회를 통과 해버리고 존 퀸시 애덤스 또한 훗날 증오의 관세법이 될 이 법안을 승인 해버렸다.

이 관세법은 미국 전역에 인플레이션을 일으켜서 미국 전체를 고통의 수렁에 빠뜨린다.

존 퀸시 애덤스 지지자들과 앤드류 잭슨을 지지하는 분파들의 대립은 존 퀸시 애덤스의 임기가 끝나가는 시점에 더욱 극렬 해졌다.

결국 182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Democratic Republican Party)는 앤드류 잭슨을 지원하는 잭소니언들을 주력으로 민주당(Democrat)로 분파 되고, 존 퀸새 애덤스를 지원하는 이들은 국가 공화당(National Republican)으로 분화가 된다.

*해당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적인 이념 분화는  2000년대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 미국 역사 중간에 여러번 바뀌므로 참고가 필요하다.

 

민주당은 '주들의 권리'와 일반 대중 중심적인 정치를 추구하였으며, 국가 공화당은 엘리트 주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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