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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 History

[USA] - 미국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 파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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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Madison(제임스 매디슨)

출생: 1751 3 1616 March 1751
사망: 1836 6 28
정당: 민주 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재임기간: 1809 - 1817
부통령: 조지 클린턴 George Clinton, Elbridge Gerry 엘브리즈 게리
별명: Father of the Constitution 헌법의 아버지

 

1812년 전쟁과 캐나다 침공

미국은 Leopard-Chesapeake (레오파드호 및 체사피크 호) 포격전, 미국의 중립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와 영국이 미국 원주민들에게 끼치고 있는 영향력으로 인한 갈등 등 많은 이유로 인해 영국과의 전쟁을 촉구하는 여론이 일어났다.

의회의 새롭게 등장한 신생 워호크 즉, 매파 치인들은 강력하게 제임스 메디슨에게 영국에 대한 전쟁 선포를 요구하였다 (Warhawk, 직역하면 전쟁 매지만 흔히 매파’ ‘비둘기파를 구분 할 때의 용어가 된다.)

 

 

제임스 매디슨은 영국과의 전쟁에 대해서 소극적이었으나 더 이상은 매파들의 전쟁 선포에 대한 요구를 묵살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연방주의정당은 이미 원래부터 영국과의 전쟁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물들이었고, 매파들이 득세하기 이전의 의원들은 모두 독립 전쟁을 겪었던 세대들이었다.) 미국 의회에서 20여일 가까운 열띤 공방 끝이 영국이 대한 전쟁 선포안이 통과되었다. 연방주의 정당과 연방주의 정당이 주류인 뉴 잉글랜드와 같은 지역에서는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캐나다 침공

 

뉴 잉글랜드 주민들은 연방군대의 입대 거부나 영국과 미국 모두에 무역 거래를 하는 등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외에도 미국 정부는 당초 예상한 인원에 못 미치는 인원들이 군대에 지원하는 등 영국과의 전쟁을 진행함에 있어서 첫 장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제임스 매디슨은 영국 왕립해군과의 해전은 곧 자살행위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기 매파들의 요구를 들어줄 겸 영국군이 주둔한 캐나다를 침공하여 영국과의 육상전에 전념하기로 결정하였다.

 

1812년 전쟁의 전개

 

그러나 캐나다 침공의 첫 걸음부터 윌리엄 헐(William Hull) 장군이 작전 실패로 꼬이면서 미국은 엄청난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캐나다 주둔 영국군의 총사령관 소장 아이작 브록 경(Sir Isaac Brock)은 뉴욕을 향한 반격까지 하게 된다.

비록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작 브록 경이 나이아가라 강의 캐나다 국경의 전투에서 미국 대위 제임스 E. 울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지만 아이작 브록경의 영국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였고, 지휘관을 잃은 대신 미국군을 전멸시켰다. 캐나다에서의 전투를 통해 영국과 협력하던 테쿰세 미국 원주민 족장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화염에 휩싸인 워싱턴 D.C.

1813년 제임스 매디슨은 연임에 성공을 하지만 그는 미국 독립전쟁 이후 미국 정부의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캐나다 침공전략은 처참하게 실패를 하였고, 영국군은 파죽지세로 워싱턴을 향해 남진하고 있었다.

미래 미국 대통령이 될 윌리엄 헨리 해리슨 장군은 테임즈 강의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미국군은 고전분투를 하였지만 영국군은 이미 여러 방면에서 방어선을 뚫어내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를 향하고 있었다.

 

백악관을 불태우는 영국군

 

1814년에는 영구군이 뉴욕의 버팔로시를 불태웠고, 체사피크 만의 일대를 뚫고 워싱턴 DC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한다. 1814 8 25, 영국은 아직 공사 중이던 수도를 불태웠고, 차례 차례로 워싱턴 DC의 도시들과 대통령 관저까지 모두 불태운다.

 

워싱턴 D.C.를 불태우는 역국군

 

 

겐트 조약과 뉴올리언스의 전투  

1814년 초부터 이미 영국과 미국은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실시하고 있었다. 존 퀸시 애덤스(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 아들)와 헨리 클레이는 영국과 평화조약을 위한 협상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가지고 벨기에의 도시 겐트(Ghent)로 향한다.

 

겐트 조약

 

영국은 미국이 추후 새롭게 개척할 영토에 대한 권리와 미국 원주민들을 위한 영토를 보장하도록 미국 정부에 요구하였다. 하지만 헨리 클레이와 존 퀸시 애덤스는 이미 대영제국이 프랑스와 나폴레옹으로 인해 이미 큰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고, 협상을 지연시키면 영국 정부가 급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겐트 조약의 체결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상대하는 일이 우선이던 영국은 기존의 요구사항들을 모두 철회하고 ‘quo ante bellum', '전쟁 이전의 상태로 원상태 복구'를 하는 조건으로 미국 정부와의 평화 협상에 동의를 하였다.

 

quo ante bellum

 

이로써 미국과 대영제국은 벨기에 겐트에서 겐트 조약에 서명을 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 교통이나 정보 등 모든 것들이 현재 보다 느려서 평화 협상 체결에 대한 소식이 늦어져 1815년까지도 1812년 전쟁이 계속되었다.

 

뉴올리언스의 전투

 

겐트 조약체결에 대한 소식이 바다 건너 정해져 오든 동안 영국군은 8,000여명의 병력으로 미국 남부의 중심지인 뉴올리언스를 대규모로 공격한다. 하지만 뉴 올리언스는 이미 요새화가 완료된 상태였으며 이와 함께 미국의 앤드류 잭슨 장군의 지휘로 영국군은 2,000명의 병력 손실만 입은 채 뉴올리언스 전투가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1812년 전쟁 또한 종식되었다.

미국 또한 수도가 불타는 등 손실이 있었지만 드디어 대영제국으로부터 중립에 대해 인정을 받고, 대영제국 또한 교역을 재개해 프랑스의 나폴레옹한테 집중을 할 수 있었다.

 

앤드류 잭슨의 동상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와 미국 애국가(National Anthem)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 1812년 전쟁 중에 포로로 잡힌 변호사였다. 그는 포로로 잡혀 있는 상태에서 영국이 현재의 볼티모어 메릴랜드에 위치함 맥 핸리 요새에 가하는 엄청난 포탄 세례를 직접 목격하였다. 영국군이 한참 포탄 세례를 퍼 부은 이후 다음 날 새벽녘에 프랜시스 스콧 키는 맥핸리 요새에서 펄럭이는 성조기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깊은 감명을 받았고 곧 바로 시를 하나 짓는다.

 

맥핸리 요새의 포격을 지켜보는 프랜시스 스콧 키

 

이 시는 프랜시스 스콧 키가 남긴 유일한 시이면서도 훗날 미국 애국가로 채택이 되는 별이 나부끼는 깃발, 스타 스팽글드 배너  'The Star-Spangled Banner' 이었다. 1931년에 The Star-Spangled Banner는 정식으로 미국의 애국가로 채택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제창이 되고 있다.  

 

 

The Star-Spangled Banner(미국 애국가)

 

Oh, say can you see,

 

by the dawn's early light,

 

What so proudly we hailed

 

at the twilight's last gleaming?

 

Whose broad stripes and bright stars,

 

through the perilous fight,

 

O'er the ramparts we watched,

 

were so gallantly streaming?

 

And the rockets' red glare,

 

the bombs bursting in air,

 

Gave proof through the night

 

that our flag was still there.

 

O say, does that star-spangled

 

banner yet wave

 

O'er the land of the free

 

and the home of the brave?

 

 

● Uncle Sam ‘샘 삼촌’ ‘엉클 샘

사무엘 윌슨은 뉴욕에서 (Ebenezer & Samuel Wilson)에베네저 & 사무엘 윌슨이라는 정육점을 하는 사업가였다. 그는 미국의 독립전쟁 발발 시기 부터 미군에 소고기를 납품을 해왔다.

1812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사무엘 읠슨은 미군에 다시 쇠고기를 납품하기 시작하였다 사무엘 윌슨의 앞 글자는 U.S.로 이는 미국의 줄임 말인 U.S.와도 동일 하였다.

 

 

사무엘 윌슨은 자신이 납품하는 쇠고기의 통에 U.S.이라는 이니셜을 새겼는데, 대규모 육군에 납품을 하고, 육군에서도 사무엘 윌슨의 별명인 샘 삼촌엉클 샘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미국과의 이니셜이 같다 보니 엉클 샘이라는 이름은 미국 정부 그 자체를 지칭하는 명사처럼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점점 세간에 알려지면서, 미국 정부를 엉클샘으로 캐리커처화 하거나 희화화 하는 칼럼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제임스 몽고메리 플래그(James Montgomery Flagg)가 그린 엉클 샘 전쟁 모병화 현재까지 가장 유명한 엉클 샘 포스터가 되었다. I want you라고 하는 대사와 함께 모두가 군인 모집하는 미국 아저씨로 아는 그 삽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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